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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전 스님의 마음 읽기] 기한(飢寒)

중앙일보

2026.02.24 07:06 2026.02.24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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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전 스님 범어사 교육국장
올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외신 기자가 한강에서 먹고 있던 라면이 얼어붙은 사진을 국제 소식으로 전하고, 유럽·러시아·중국·미국 등에서는 폭설·한파·정전·결항 등 재해 소식이 들려왔다.

이런 소식을 들으며 산중 오두막에 겨울을 나러 왔다. 이 오두막은 야산이라 아름답지도 않고, 생존을 위해 낫과 삽이 필요한 곳이다. 여기 있다가 외출하면 세상이 궁궐처럼 느껴진다. 여기도 호스와 수도가 모두 얼어붙었다. 오랜만에 도끼질을 했다. 화목난로를 피우기 위해서다.

뼈에 사무치는 추위와 가난함
노력과 성취의 원동력이지만
성취했다는 생각마저 버려야

춥고 배고프다는 것은 무엇일까? ‘춥고 배고파야 도 닦을 마음을 낸다’는 오래된 경구가 있다. 삶의 밑바탕에서 우러나오는 생존 욕구와 지고한 정신의 극점에 이르려는 고차원적 갈망이 겹쳐야 한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피부로 느끼는 윤택함과 풍요 속에서도 본래 의지를 잃지 않는다면 그것이 가장 뛰어난 정신일 테지만, 우리 정신은 그리 튼튼하지 못하여 드높던 의지도 외적 자극의 달콤함에 쉬이 녹아내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추위와 가난은 엄청난 노력의 원동력이 된다. 가난했다가 부유해진 우리 현대사는 수많은 미담을 갖고 있다.

끼니를 거르기 일쑤이던 보릿고개 시절 호롱불 아래서 책을 읽다가 콧구멍이 새까맣게 그을리고, 밤마다 속옷에 들끓던 이를 잡던 아이는 10여 개 단체를 창립하고 21권의 저서를 낸 부산불교의 전령사가 되었다.

어린 여동생을 안고 구걸하다가 쫓겨나 논두렁에 곤두박질치면서 이마가 찢어져 피 흘리던 아이는 대우중공업 명장이 되었다.

우유 마시는 친구를 부러워하며 라면 먹던 소녀는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휩쓸었다.

가난이 싫어서 그 반대편으로 열심히 달린 것이다. 종교에서도 가난을 중요한 가르침의 용어로 사용해왔다. 성경(마태복음 5장 3절)에 가난을 찬탄하는 구절이 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입춘 다음날 기림사를 방문할 일이 있었다. 천불전 앞 화단에 홍매가 피었다. 오늘 갑자기 피었다고 한다. 홍매를 보니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일찍 핀다는 자장매를 보고 싶어졌다. 통도사로 갔다. 자장매 역시 꽃망울을 열고 있었다.

이번 매화는 박비향(撲鼻香)이겠구나 하였다. 박비향은 그 향이 진해서 코를 찌르는 것을 말한다. 박비향은 추위가 뼛속을 관통해야 얻어진다. 어찌 매화 향기뿐이랴. 겨울 호숫물이 얼어야 풍년이 든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얼마나 가난해야 할까?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 그대의 본래면목은 무엇인가?”라는 위산 스님의 질문에 크게 깨달은 향엄 스님은 자신의 내면 상태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위산 스님은 9세기에 선종의 다섯 종파 중 위앙종을 열었던 스님이며, 향엄 스님은 그 제자이다.

‘작년 가난은 가난이 아니고(去年貧未是貧),
금년 가난이 비로소 가난일세(今年貧始是貧)
작년엔 송곳 꽂을 땅이 없더니(去年無卓錐之地),
금년엔 송곳조차 없네(今年錐也無)’

가난이란 무언가의 결핍이다. 이 시에서 가난함은 번뇌가 없다는 의미이다. 선(禪)은 마음에서 잡생각들을 제거하여 단순하게 함으로써 본래 마음의 진면목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송곳마저 버리고 완전히 단순해졌다고 해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단순해졌다는 생각마저 없을 것이 요구된다.

사찰 벽에 흔히 십우도(十牛圖)라는 그림이 있다. 마음의 진면목에 도달하는 과정을 소를 찾는 과정에 빗대어 열 가지 장면으로 그린 것이다. 소를 찾아 그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고 나면, 소를 잊고, 소를 탄 자신도 잊어야 근원으로 돌아간다. 그러고 나면 다시 시장에 나와 중생을 교화한다는 것이다.

목표의 이름이 무엇이든, 그것이 부자이든, 가난이든, 출세든, 출세간의 깨달음이든 그것을 성취했을 때 성취했다는 생각을 버리고 시장에 나가 이타행(利他行)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제까지 마음의 때를 모두 떨쳐버린 그곳이 다시 성취했다는 생각으로 가득 채워지고 잘난 체하게 되고 교만해질 것이다.

각전 스님 범어사 교육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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