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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의 인생] "시키는 일 안 했더니 대표가 됐다"

중앙일보

2026.02.24 07:14 2026.02.24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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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범준 세바시 대표 인터뷰
IMF 직격탄으로 입사하자마자 대기발령 받았던 신입PD가 재입사 후 본인이 만든 프로그램으로 독립해 대표가 됐다. 구범준 세바시 대표 얘기다. 지난 23일 만나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강정현 기자
신입 시절 대기발령 받고도 자비 들여 회사 관련 홈페이지 만들고, 재입사 후엔 돈 벌어오라는 상사 하나 없는데 50억원 매출(3년 누적) 콘텐트를 만들었다. 독립 약속 믿고 퇴근 잊고 달렸지만 정작 포상 대신 징계로 돌아오자 과감히 사표를 던졌다. 하지만 회사가 다시 매달려 1년 만에 결국 2017년 독립 법인을 만들었다. 구범준(55) 세상을바꾸는시간15분(이하 세바시) 대표다.
300대 1 문턱 넘었더니 대기발령
무기력 대신 다른 선택 했더니
영향력 커지고 선택지 늘더라
AI 시대, 내 스토리는 대체 불가
지난 2011년 한국에 없던 15분짜리 짧은 공개 강연 쇼 형식으로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1600명 넘는 강연자가 세바시 무대에 섰다. 모바일 시대에 발맞춰런칭부터 함께한 유튜브 채널 구독자는 현재 218만, 조회 6억회에 육박한다. 스타 진행자 없는 인문 교양 채널로는 이례적이다. 숫자를 넘어 "내 목숨을 건져줘 감사하다"는 어느 강연 영상 댓글처럼 사람 살리는 콘텐트로까지 인정받고 있다. 쉼 없이 달려온 지난 15년을 담은『마음을 읽는 감각』을 낸 구 대표를 지난 23일 중앙일보 본사에서 만났다. 그의 남다른 커리어 여정을 그의 시각에서 정리했다. 안혜리 논설위원
입사하자마자 대기발령 받다
"A4 용지 한 장 살 돈이 없다. "
7차에 걸친 시험, 300대 1 경쟁률. 사시·외시·행시만큼 어려웠던 그 시절 '언론고시'를 뚫고 1997년 CBS에 PD로 입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기발령 어쩌고" 하는 흉흉한 소문이 돌더니, 2주 만에 현실이 됐다. 회사 기조실장은 나를 비롯한 공채 21기 수습 PD·기자들을 모아놓고 A4 용지 운운하며 사실상 "나가라"는 통보를 했다. 한국이 처음 경험한 IMF(국제통화기금) 경제위기는 평생직장 신화 속에 살던 은행원 등 기성세대 화이트칼라만 길바닥에 내동댕이친 게 아니라 이렇게 사회 초년생 일자리도 빼앗아갔다.
한국노총 산하 전국금융노련(위원장 이용득)소속 조합원 120여명은 15일 오전 금융감독위와 〈br /〉국제통화기금(IMF)의 은행관련 협의가 열릴 예정이던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2가 금융감독원을 〈br /〉항의방문,정부와 IMF는 '제2의 금융기관 구조조정'을 불러올 정책협의를 즉각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분노했다. 몇 분 지각조차 약속을 어긴 거라며 언론인 자질 타령하며 꾸짖던 회사 아닌가. 화는 치미는데, 회사뿐 아니라 나라가 망한 터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누구는 자포자기하고, 누구는 주유소 알바와 신문 배달로 버티고, 누구는 정말 사표 던지고 회계사 준비했다. 사회학과 나와 다큐멘터리 PD를 꿈꾸던 전형적 문과생이던 나는 일단 아는 형님의 게임 벤처에 들어갔다. 인터넷 홈페이지가 막 생겨나던 시절, 여기서 코드 몰라도 쉽게 홈페이지 만들 수 있는 소프트웨어 툴(나모 웹에디터 1.0)을 배워 엉뚱한 짓을 했다. CBS21.co.kr이라는 인터넷 도메인(주소)을 사서 홈페이지를 만든 거다.

목표는 딱 하나였다. 잊히면 안 된다, 기억돼야 한다는 오기였다. 입사 동기들한테 전화를 돌렸다. 예닐곱 명이 CBS 기사 모니터링하고 자기 기사와 칼럼을 올렸다. IMF 시대 청년의 초상, 부산국제영화제 현장 리포트 등등…. 동아일보의 '이주의 홈페이지' 연재 코너 눈에 띄었고, 우릴 완전히 잊었던 보도국 선배가 찾아왔다. 9개월 만에 다시 수습 발령을 받았다. 거짓말처럼 전부 내 계획대로 됐다. 쾌감이 상당했다.

무엇보다 인생을 바꾼 결정적 깨달음을 얻었다. 환경은 주어지지만 선택은 온전히 내 몫이라는 점 말이다. 좌절·실패 등 어려운 순간에도 포기나 비관 대신 나부터 달라지려 노력했다. '(외부) 자극'과 '(나의) 반응' 사이에 무기력이나 파괴적 행보 대신 '노력하는 행동'을 선택했다. 커리어 내내 이런 선택을 쌓았더니 이젠 내 삶의 태도로 장착했다.
안 시킨 일 하니 인정받다
재입사 후에도 안 시키는 짓을 계속했다. 2002년 TV 개국 전까지 원하는 다큐 제작 대신 라디오를 해야 했다. 또 프로그램 단독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정작 CBS 전체 홈페이지는 없었는데 난 내 홈페이지 게시판에서 신청곡과 사연을 받았다. 회사 보기에 난 '난 놈'이었다. 그래서인지 무슨 제안이든 잘 먹혔다.

공개 강연 쇼도 그중 하나다. CBS가 케이블·위성 TV 기독교 전문 채널을 연 이후 몇 년 CCM(기독교음악) 프로그램 등을 만들며 관찰해보니, 기독교방송엔 기쁨·슬픔·감동·눈물은 다 있는데 없는 게 하나 있었다. 웃음이었다. 우연히 KBS '아침마당'에 출연한 스타 강사 김창옥 강연을 보곤 '이거다' 싶었다. 그땐 무명이었는데 방청석 아주머니들을 자지러지게 웃겼다. 무작정 찾아갔다. 그렇게 공개 녹화 강의 쇼 '김창옥의 만사형통'(2009·시즌1)이 탄생했고, 대성공했다. 100석 남짓 작은 소극장에서 격주에 한 번 공개 녹화할 때마다 방청 신청이 쇄도했다. 당시 한국에서 18분 공개 강의로 유명한 TED의 지역 모델인 TEDx가 인기를 끌기도 했지만, 이 경험을 통해 공개 녹화 강의 쇼의 가능성을 엿봤다. 방송용이 아니라 오프라인 강연회 브랜드 '세상을 바꾸는 시간(세바시)'이 세상에 나온 배경이다.
지난 2011년 5월 무모한 3가지 요구조건을 걸고 시작한 '세바시' 첫 강연 때 모습. [사진 구범준]
사실 세바시는 2011년 5월 출발부터 또 수요 없는 공급의 과욕을 부렸다. 기획 발표 때 회사에 세 가지 예외를 요구했다. 첫째, (기독교방송인데) 기독교 콘텐트 안 만들겠다. 둘째, (TV 방송인데) 유튜브를 메인 채널로 하겠다. 셋째, (CBS는 당시 SD 표준화질 제작인데) HD(고화질)로 만들겠다. 다 이유가 있었다. 시청자 확장엔 모두 보는 프로그램이 필수였다. 또 종편 개국 후 시청률이 0%대로 떨어졌는데, 아무도 안 보는 채널 대신 사람들이 볼 채널(유튜브)에 콘텐트를 꽂아야 했다. KBS·SBS조차 별생각이 없을 때 세바시 유튜브 채널을 만들었다. 언론사로선 MBC에 이어 두 번째, 개별 프로그램으론 아마 첫 시도일 거다. 마지막으로 시청자 눈높이에 부응하려면 우리가 아무리 제작비 부족한 마이너 매체라도 HD여야 했다. 작가 없이 나와 조연출 둘에 FD 둘, 소수로 팀을 꾸려 격주로 400석짜리 클래식 콘서트홀에서 외부 기술인력을 써서 세바시를 제작했다. '개그 콘서트'와 열린 음악회' 말고는 공개 녹화 없던 시절이라 초기엔 한 달에 12명의 강연자 섭외보다 객석 채우기가 더 어려웠다.
사표 던졌더니 대표 되다
대다수 방송 강연 프로그램은 비공개 녹화에다 교수 등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강연자가 최소 60분 이상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것부터 재정의했다. 공개, 15분, 그리고 독특한 경험으로 전할 메시지만 있다면 누구나 무대에 세웠다. 사장은 노발대발했다. "아무도 모르는 무명 얘기를 누가 듣느냐, 때려치우라"고 했다. 그런데 웬걸. 그해 12월, 객석엔 빈자리 하나 없었다. 이젠 자기 이름 단 TV쇼 하는 스타 상담가 이호선 교수가 바로 그 무명의 2호 강연자였다.

급변하는 미디어 흐름에 잘 올라탄 덕분이었다. 유튜브가 평정한 지금과 달리 그땐 다음TV팟 등 포털이 국내 동영상 시장을 놓고 접전을 벌였다. 콘텐트와 유통, 서로의 니즈를 채우기로 했다. 그렇게 포털 다음에 수요일마다 '15분'이라는 동영상 스트리밍 탭을 만들어 강의 영상 썸네일 5개씩을 올렸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심지어 그해 말, 대우증권에 내부교육용으로 강연 영상을 2000만원에 팔았다. 똑같은 월급 받으며 회사에 돈 벌어다 주는 최초의 PD가 된 거다.

내 영향력은 더 커졌고, 회사에 새 제안을 했다. "향후 3년 동안 사내 벤처처럼 결재라인보고 않는 사업팀으로 운영해 흑자 내면 독립시켜달라"고. 2013년 8월 동기들이 차장일 때 난 콘텐츠본부장 직속 국장급 독립 사업팀장이 됐다. 그리고 목표대로 3년 동안 50억원 매출에 7억~8억원의 흑자를 냈다.

"독립시켜 주십시오. " 원래 이 한마디로 족해야 했다. 그런데 세바시를 만드는 동안 회사를 떠나있던 선배가 사장으로 왔다. 신임 사장은 모르쇠로 일관했고, 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다. 이사회 안건에 이 사안을 올리기는커녕 예산 사용과 브랜드 남용을 문제 삼아 '주의' 징계를 내렸다. 난 2016년 사표를 냈다. 벼랑 끝 결정이었다. 다만 신입 때 얻은 교훈대로, 무기력하게 손을 놓아버리거나 홧김에 파괴적으로 반기를 든 게 아니라 나름 전략적 선택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통했다.

모든 조직이 그렇듯 우리 회사도 다른 조직원으로 갈아 끼우려 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몇 년 동안 회사 리소스 투입 거의 없이 나 혼자 섭외 등 모든 제작 노하우와 미디어 전략을 일임하다 보니 감당할 사람이 없었다. '연 매출 10억원 이상'을 조건으로 내건 사내 공모 지원자는 0명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회사 6700만원, 내 돈 3300만원으로 회사를 설립했다. 회사 소유 IP인데, 그걸 만든 직원에게 지분을 줘서 독립법인을 세운 이례적 사례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인터넷과 모바일, 그리고 AI까지. 시대마다 정답이 달라지는 와중에 내가 깨달은 불변의 법칙은 하나다. 자기만의 이야기(의미와 메시지)가 있는 사람은 대체되지 않는다는 것. 세바시가 15년간 무명의 사람들을 무대에 세운 이유인 동시에 내 삶의 이유다.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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