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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의 인간사] 그 빵은 누가 먹었을까

중앙일보

2026.02.24 07:16 2026.02.24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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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 소설가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혼·분식 장려 운동(혼분식운동)’이라는 게 있었다. 전후 베이비 부머를 포함, 급속히 늘어나는 인구가 나눠 먹기에는 주곡인 쌀이 턱없이 모자라는 상황이니 잡곡과 밀가루를 넣어(주곡과 섞어) 만든 음식을 함께 먹자는 취지의 민관 합동 성격의 운동이었다. 이에 따라 싸전에서 쌀을 판매할 때는 잡곡을 섞어 팔아야 했고, 음식점에서도 쌀밥에 잡곡을 꼭 섞어야 했다고 한다. ‘~했다고 한다’로 표현한 것은 나의 경우 읍내에서 2㎞쯤 떨어진 시골 동네에 살았던 데다 집에서 벼농사를 짓고 있어 읍내 싸전에서 쌀을 사본 적도, 음식점에서 밥을 사 먹어 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결식 아동 옥수수빵 주던 시절
안 먹고 어린 동생 주던 친구도
전체 급식으로 바뀌자 빵 남아
안 받는 아이들 생겨났기 때문

김지윤 기자
선생님의 분식 솔선수범
혼분식운동 기간 중에는 각급 학교 교실에서는 전대미문의 ‘도시락 검사’라는 게 실시되었다. 점심시간이 시작되기 전 담임 선생이 아이들이 싸 온 도시락에 쌀과 잡곡이 제대로 섞여 있는지 검사를 했고, 일정 기준(7:3 비율이었던가?)에 미달하는 아이들은 벌을 서기도 했다. 나는 벌을 서본 적이 없지만 ‘혼분식의 노래’는 같이 불렀다. 후렴 부분에 있던 ‘쑥쑥 키가 큰다/ 힘이 솟는다/ 혼식 분식에 약한 몸 없다’ 같은 가사가 기억날 듯 말 듯하다. 노래가 끝날 때쯤에 담임 선생이 학교 교문 앞 식당에 주문한 우동이 냄비째 배달되어 왔고 선생님은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솔선수범’하여 분식을 실천했다.

‘운동’이라는 단어의 본래 취지에 맞지 않는 강제성을 띤 도시락 검사에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아예 도시락을 싸 오지 못하는 학생들에 대해서는 도시락 검사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천만 다행하게도 그때를 전후해 점심시간에 도시락 미지참 아동(결식아동)에 대한 급식이 이루어졌는데 급식 때 나눠준 건 샛노란 옥수숫가루로 찐 빵이었다. 이국적인 풍미의 빵이 군것질거리로 보였는지 제 도시락과 바꿔먹는 아이들도 있었다. 편식에 낯가림이 심했던 나는 그러지 못했다.

서무실 앞에서 나눠주는 급식 빵을 타오는 일은 반장과 부반장(남·여) 하여 세 사람에게 맡겨졌다. 4학년이 되어 난생처음 부반장으로 선출된 나도 바구니를 들고 빵을 타러 갔다. 우리가 타오는 빵의 수효는 정원 50명 한 반의 열댓 명 분에 해당했다. 그렇게 어려운 셈도 아닌데 도시락을 싸 오지 못해 빵을 받아야 하는 사람과 빵의 숫자가 맞지 않는 경우가 가끔 생겼다(남는 건 아니고 한두 개가 모자랐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그날도 빵을 받을 사람에 비해 수령해온 빵이 하나 모자랐고, 빵을 타온 반장 하나와 부반장 둘이 중간에서 그 빵을 먹었거나 어디다 감춰두었다가 집에 가서 먹으려고 한 게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다. 끼니 한 끼 먹고 못 먹고의 차이가 얼마나 큰 건지 나는 잘 몰랐다. 억울하기만 했다. 어쨌든 빵을 받은 아이들이 조금씩 빵을 떼어서 빵을 못 받은 아이에게 주었다(이런 자발적인 행동을 ‘십시일반’으로 부른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점심시간이 지나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학교에서 내가 사는 동네보다 3㎞쯤 더 가는 동네에 사는, 앞에서 바삐 걸음을 옮기는 아이의 책보에서 고개를 빼꼼 내놓은 노란 빵을 목격하게 되었다. 누가 흘린 급식 빵을 주웠을까? 궁금했지만 물어보지는 않았다. 학교에서 본 얼굴이긴 했어도 말을 나눌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열흘쯤 뒤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다시 한번 그 아이와 동행을 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그 아이의 책보가 허리에 단단하게 둘러매져 있었다. 보통 책보에 든 빈 도시락에서는 도시락 주인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달그락달그락 숟가락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곤 했는데 그 아이의 책보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도시락이 없는 모양이었다.

잊히지 않는 형제의 뒷모습
우리 두 사람이 내가 사는 동네 앞 다리 곁에 다다랐을 때 예닐곱 살쯤 돼 보이는 자그마한 아이가 뛰어나오며 “형아!”하고 불렀다. 형이라고 불린 그 아이는 동생을 한 번 안아주고는 얼른 책보를 풀어서 푸슬푸슬한 옥수수빵을 꺼내 주었다. 동생이 허겁지겁 빵을 먹는 동안 허기진 눈으로 빵을 집었던 손가락을 빨던 그 아이, 손을 잡고 폴짝폴짝 뛰어 물빛 푸르던 저수지 너머 집으로 향해 가던 형제의 뒷모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렇게 사이좋던 형제는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할까. 틀림없이 우애롭게 잘살고 있을 것이다.

5학년이 되었을 때는 빵 급식이 재학생 전원을 대상으로 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여전히 부반장이었던 나는 다른 반 아이들에게 빵을 나눠주는 일을 맡게 되었다. 점심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각 학급에서 네 명의 ‘빵 당번’이 바구니를 들고 선착순으로 빵을 타기 위해 줄을 섰다. 빵을 든 아이들이 흩어지고 나면, 그 북새통 속에서 정확하게 센다고 셌는데도 꼭 한 반에 몇 개씩 남았다.

나중에 빵이 남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빵을 타러 온 아이들이 한두 개씩 ‘알아서’ 두고 간다는 것이었다. 누가 달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그때 학교에서는 배울 게 참 많았다. 그런데 나눠주고 나면 언제나 조금씩 남았던 그 빵, 도대체 누가 다 먹었을까.

성석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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