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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국민의힘, 보수의 길

중앙일보

2026.02.24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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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연 서울대 석좌교수·경제학부
정치는 어렵다. 스스로 모순덩어리인 인간이 진영으로 나뉘어 충돌하는 마당에 어떤 정치인이 이를 일관성 있게 정렬해 모두가 기뻐하는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겠나. 그러기에 정치인에게는 특별한 자질이 요구된다. 막스 베버가 정치를 소명의 영역이라 부른 까닭도 여기에 있다. 숫자 하나, 단어 하나를 두고 며칠을 고민하는 일상을 견뎌내야 학자가 되듯, 대의(大義)를 향한 열망으로 가슴이 고동치지 않는 정치인은 정치꾼으로 전락한다. 베버의 명언처럼 “정치란 열정과 명료한 안목으로 단단한 널빤지에 구멍을 뚫는, 느리고도 고된 작업이다.” 이 자질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나라를 위해서라도 정치에 나서지 않는 것이 좋다.

정치란 고된 작업을 수행하려면
대의와 열정, 공감이 요구되지만
국민의힘은 이 모두를 상실한 듯
길 잃은 보수에게 소명을 묻는다

국민의힘이 내세우는 대의는 무엇인가. 마르틴 루터가 자신의 신앙 양심에 따라 “내가 여기 서 있나이다. 달리 행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외쳤듯이, 대한민국 정치인의 심장에 새겨져 물러서지 못하게 만드는 결단의 소리는 무엇인가. 그러나 지금의 여의도에는 정치가의 외침은 들리지 않고 정치꾼의 소음만 가득한 듯하다. 이념적 스펙트럼의 극단에 선 대중은 자신이 갈등의 진원지인 것을 잊어버리고 정치인을 제 편으로 끌어들여 세상을 자기가 믿는 대로 주무르려 한다. 그러나 양극단의 중간 지대에서 공동체의 안녕을 바라며 세상을 더 넓고 멀리 투시하려는 사람은 말을 삼간 채 관찰하며 때로 신음하고 한숨을 쉰다. 이들의 마음을 붙잡을 대의는 무엇인가. 영국 상원은 보수당 출신 중 가장 위대한 총리로 꼽히는 벤저민 디즈레일리의 생애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그의 삶을 지배했던 열망은 위대한 영국을 위한 열심이었다.” 극단에 분포한 지지층을 결집해 권력을 누리겠다는 술책이 아니라 한국 전체를 위한 ‘열심’이 보수 정치를 사로잡을 때는 언제인가.

보수의 핵심 가치는 자립과 자유다. 자립은 다른 사람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삶을 개척하는 역량이며, 자유는 자발적 의사결정으로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는 힘이다. 보수는 지나친 복지나 과도한 규제 같은 진보의 과잉이 자립을 잠식하며 자유를 제약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 가치를 내세우는 보수 정당 정치인은 스스로 자립과 자유를 실천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국민의힘은 홀로 일어서기를 거부한 채 외부 세력과 일부 유튜버에 카리스마를 의존하고 있다. 이처럼 정치인의 필수 자질 중 하나인 카리스마를 외주하려는 정당을 누가 보수라 부르고 신뢰할 수 있겠나. 진정한 보수 정치인은 대의를 위해서라면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암벽을 기어오른다. 정치가의 카리스마는 이런 용기에서 만들어진다. 절벽과 암벽에 매달려야 비로소 용기라는 근육이 생기고 카리스마가 따른다. 그러나 용기를 사치재로 여기는 비겁한 보수는 그 고통을 외면한다.

공감은 보수의 정신이며, 개혁은 그 열매다. 자립이란 역량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선 자라기 어렵다. 자립을 위해 진보는 먼저 복지를 생각하지만, 보수는 제도의 개혁을 우선한다. 디즈레일리는 부자가 가난한 자를 외면하면 결국 사회 전체의 자유가 붕괴한다며 서민의 곤경을 해소하기 위해 열심을 다했다. 보수는 귀족이 아닌 ‘국민의 당’이 돼야 한다는 믿음에서 도시 숙련 노동자에게로 투표권을 확대하였다. 주거법을 제정해 노동자를 위한 위생적인 주택을 건설했고, 공중보건법을 만들어 서민이 일할 수 있도록 건강을 지켜주었다. 노동자의 법적 지위를 격상하고, 공장법으로 여성과 아동의 노동시간을 규제했다. 이러한 제도 개혁의 정신은 공감이었다. 애덤 스미스도 시장경제의 가장 중요한 토대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정신, 즉 공감이라고 설파했다. 한국 보수의 미래는 서민의 애환과 중산층의 노고에 얼마나 공감하느냐에 달려 있다.

보수는 겸손한 비관주의에 기초한다. 아무리 사회를 개혁해도 유토피아는 올 수 없다고 믿는다. 애덤 스미스는 오감이란 경험을 통해 진리를 찾아가는 인간의 인식과 판단엔 분명한 한계가 있다고 강조했다. 더욱이 세상은 억울한 죽음이 있을 정도로 역설과 반전이 가득하다. 따라서 필요한 개혁은 반드시 하되, ‘인간 사회를 장기판으로 간주하는 정치인의 과도한 개입’은 극도로 경계했다. 이 겸손함과 신중함이 개혁의 질과 내용을 결정한다. 이상을 지향하되 현실의 제약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유권자도 현실 정치란 채이고 찢기는 일상의 반복임을 알아주는 도량이 필요하다. 특히 갈등이 극심한 한국에서는 칼날 같은 유권자도 있어야 하지만, 정치와 정치인을 더 넓게 품으려는 국민도 필요하다. 정치는 무엇보다 결과로 말하며, 그 과정 하나하나에 철저하고 완전무결한 순수성을 요구하기 어려움도 이해해야 한다.

대의, 자립, 공감이 없는 보수는 살았으나 죽었다. 대의가 열정을 낳고 열정에 통찰력이 더해져야 보수의 생명력이 살아난다. 죽은 보수를 살리는 길은 권력의 기술이 아니라, 잃어버린 소명의 복원이다.

김병연 서울대 석좌교수·경제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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