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서북부 워싱턴주의 소도시 리치랜드는 컬럼비아강을 따라 형성된 한적한 마을이다. 지난달 23일(현지시간) 찾은 리치랜드 외곽에서 가장 눈길을 끈 건 거대한 수증기를 내뿜는 컬럼비아 원자력발전소 냉각탑이었다. 1984년 가동을 시작해 지금까지 미 서북부에서 유일하게 운영 중인 상업 원전이다. 북서쪽으로 조금 더 이동하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핵무기용 플루토늄을 생산했던 핸퍼드 시설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도 수천만 갤런의 방사성 폐기물이 지하 탱크에 보관돼 있다. ‘경보 시 즉각 대피하라’는 문구의 빛바랜 표지판들은 한때 핵무기 생산의 전초기지였던 이곳의 긴장감과 이후 이어진 침체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핵폐기물 오염지’라는 오명을 안았던 이 지역은 최근 미국 산업계에서 뜨거운 주목을 받는 곳으로 바뀌었다. 인공지능(AI)발 ‘원전 붐’이 본격화하면서다. 컬럼비아 원전 인근에서 만난 주민 대니얼은 “많은 일자리가 생기고, 새로운 인구도 유입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안전성에 대한 우려를 묻자 주민 소피아는 “이곳에 사는 나와 우리 가족, 친구들은 그런 두려움이 없다”고 했다. 리치랜드 인근 컬럼비아 베이슨칼리지(CBC)의 원자력기술 과정 책임자인 제이슨 스톤 조교수는 “한 해 40명을 밑돌던 등록생이 올해 61명으로 늘었다. 아이 넷을 키우는 싱글맘까지 수업을 들을 정도”라고 말했다.
미국 아마존은 지난해 10월 소형모듈원전(SMR) 개발사 엑스에너지와 손잡고 컬럼비아 원전 인근에 SMR 12기로 구성된 ‘캐스케이드 첨단 에너지 시설’을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구글·마이크로소프트 등의 글로벌 빅테크가 이미 대규모 SMR 투자계획을 밝힌 가운데, 아마존은 실제 건설 부지와 조감도 등을 공개하고 나섰다. SMR은 대형 원전보다 낮은 비용으로 빠르게 지을 수 있는 데다, 탄소 중립을 달성할 수 있는 에너지원으로 꼽힌다.
미국은 에너지부(DOE) 주도로 세계 최대 규모의 SMR 상용화를 추진 중이다. 2020년 이후 책정한 SMR 관련 예산만 68억 달러(약 9조8300억원)에 달한다. 전방위적인 ‘물량 공세’로 시장 선점에 나선 것이다. 인력 양성에도 무게를 싣고 있다. 개별 대학의 원자력 과정에 정부가 지원금을 지급하는 형태다. 컬럼비아 베이슨칼리지 역시 최근 DOE로부터 200만 달러(약 28억원)의 지원금을 받아 원자력 기술 과정을 대폭 강화했다.
스톤 교수는 원전 부활이 일시적 현상이 아닌 ‘구조적 변화’라고 단언했다. 그는 “AI 데이터센터 확장을 위해 탄소를 뿜는 디젤발전기를 돌리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미래가 아니다”며 “원전은 24시간 내내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청정에너지”라고 말했다.
SMR 대전환기 주도권을 잡으려는 국가 간 경쟁은 치열하다. 2050년까지 신규 대형 원전 10기 이상 건설을 중인 프랑스와 영국은 별도의 기금을 마련해 SMR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탈원전 이미지가 강했던 네덜란드·이탈리아 역시 신규 원전 건설 대열에 합류했다. 독일 정도를 빼면, 유럽 다수가 원전으로 방향타를 돌린 셈이다. 한국 주변의 움직임도 달라졌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원전 의존도를 줄여오던 일본과 탈원전 주민투표까지 했던 대만은 정책을 되돌리며 원전 비중을 다시 키우고 있다. 전 세계에서 개발 속도가 가장 빠른 중국은 올해 세계 최초로 상업용 SMR 가동을 시작한다.
한국도 지난 12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SMR 특별법’을 통해 판을 깔았다. 정부는 2028년까지 한국형 i-SMR 표준설계 인가를 마치고, 2035년까지 약 700㎿ 규모로 실증·상업 운전에 들어가는 걸 목표로 잡았다. i-SMR은 170㎿급 일체형 경수로로 국내 원전 산업계와 연구기관이 참여하는 국가 전략 모델이다.
미국·유럽·중국의 치열한 각축전이 시작된 가운데 한국이 ‘늦은 출발’을 극복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오근배 서울대 원자력정책센터 연구위원은 24일 열린 ‘원자력 기속 가능성에 대한 워크숍’에서 “한국의 약점은 규제의 경직성과 부지 수용성, 재원 확보”라며 “민간이 사업할 수 있도록 파격적인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같은 센터의 박석빈 연구위원도 “원전 수용 지역 주민에게 전기요금을 ‘생산 원가’ 수준으로 책정하는 등 실질적인 혜택이 가도록 정책을 유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