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년 전 학회에 갔더니 발표 논문 20개 중 15개가 서울에 있는 큰 병원들의 연구였어요. 나머지 병원은 다 합쳐도 5개 될까말까 했을 만큼, 지역 병원은 연구할 여력이 바닥이었어요.” "
김지윤 칠곡경북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에게 지난 10여년은 "진료만으로도 버거운 시간"이었다. 김 교수는 “지방은 더 상황이 안 좋았고, 진료·당직도 간신히 버티던 지방은 더 안 좋은 상황이라서 병원 간 공동 연구에 참여할 여력은 없었다”고 전했다. 소아혈액암처럼 환자 수가 적고 전국에 흩어져 있는 질환은 진료 현장이 버티지 못하면 연구는 더 멀어진다.
국내 소아암 환자 치료·연구는 수도권 쏠림이 심하다. 소아혈액암 환자 중 서울·경기에서 치료받는 비율은 2015년 74%에서 2024년 78.3%로 늘었다. 지역 거점병원이 있어도 최신 유전체검사, 첨단 치료법을 적용 받으러 수도권을 오가는 이들이 많다. 그만큼 지역 환자·보호자의 부담은 커지고 치료 기회의 격차는 벌어진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이건희 소아암 극복사업 지방 거점병원 지원 사업’이 올해 시동을 걸었다. 고(故) 이건희 회장 유족의 기부금 3000억원을 재원으로, 앞으로 4년간 지방 거점 국립대병원을 지원해 소아혈액종양에 대한 다기관 임상 연구의 기반을 키운다. 양산부산대병원, 칠곡경북대병원, 충남대병원, 화순전남대병원, 제주대병원 등이 지원 대상에 포함됐다.
이건희 소아암 극복사업은 전국 소아혈액암 환자에게 전장유전체 분석, 미세잔존암 검사, 다기관 임상연구 등 첨단 진단과 표준화된 치료를 적용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는 게 목표다. 하지만 지역 의료기관은 사업 관련 행정 업무, 환자 등록·관리까지 의료진이 맡다 보니 연구 참여가 어려웠다. 다기관 임상연구는 촘촘한 절차, 꼼꼼한 기록이 필수다. 충남대병원 소아청소년과 임연정 교수는 “1명당 동의서 설명만 30분~1시간이 걸린다. 보고·입력·모니터링까지 업무가 너무 많아 임상 참여가 사실상 막혔다"고 했다.
사업을 통해 이들 지역 거점병원에 전담 인력이 지원된다. 병원 생명윤리위원회(IRB) 준비, 연구 참여 환자·보호자 동의 절차, 상담, 데이터 입력과 보고·관리를 맡을 인력이다. 이를 통해 지역 환자도 국제 임상연구에 참여할 수 있다. 예후 인자를 파악하는 최신 유전자 검사를 받게 되고 검사비도 지원된다. 전국의 환자 데이터도 한데 모을 수 있게 됐다.
현장 반응은 뜨겁다. 김지윤 교수는 “이제껏 없던 혁신적 지원이다. 내가 여기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됐다"라고 평했다. 그는 “환자에게 최신 치료를 하려면 연구와 진료가 양자택일 구조가 되어선 안 되는데 그간 어려웠다"라며 “이제는 둘 다 포기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임연정 교수도 “2019년 이후엔 전공의가 거의 없어 교수끼리 당직을 서는 상황이라 연구할 여력이 거의 없었지만, 이제는 달라질 것 같다”라고 했다.
강형진 서울대병원 교수(소아암·희귀질환지원사업단암사업부장)는 “2024년 시작된 보건복지부의 소아암진료체계 구축 사업으로 지방 진료 기반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이건희 소아암 극복사업을 통해 첨단 진단과 표준화된 다기관 치료까지 연계할 수 있게 됐다"며 "전국 환자들이 거주지와 관계없이 동일한 수준의 진단과 치료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연구 방향은 ‘한국 아이들의 데이터 확보’에 닿아 있다. 김지윤 교수는 “주로 해외 최신 연구를 바탕으로 치료하지만 우리 아이들 특성과 다를 때가 있다. 한국 아이들의 데이터로 치료 가이드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임연정 교수도 “같은 치료인데 반응이 다른 이유를 국내 데이터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4년 뒤 연구 결과가 기대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