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 사랑 대신 계급·권력 구조로 재해석 집착의 미학 속 파멸과 복수 이야기 배경 '요크셔 무어' 고딕 미장센 정점 마고 로비, 욕망과 균열의 캐서린 역
에메렐드 페넬 감독의 2016판 ‘폭풍의 언덕’은 사랑을 낭만이 아닌 집착과 파괴의 감정으로 묘사하고 계급과 욕망, 정체성 문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 한다. [Warner Bros. Pictures]
사랑은 왜 고통스러워야만 할까. 우리는 왜 ‘고통이 따르지 않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라는 말에 쉽게 동의하는 걸까. 요크셔의 황량한 들판, 폭풍이 몰아치는 언덕 워더링 하이츠.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이름이 새겨진 자리, 서로를 구원하면서 동시에 파멸시키는 운명의 무대다.
1847년 발표된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은 미친 사랑, 아픈 사랑, 집착의 대명사가 되어왔다. 고아 소년 히스클리프를 데려온 언쇼, 그를 증오하는 힌들리, 그리고 그와 영혼처럼 얽히는 캐서린.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 이후 시작된 학대와 계급의 벽, 캐서린의 에드가와의 결혼은 히스클리프를 떠나게 만든다. 부자가 되어 돌아온 그는 복수를 결심한다. 사랑은 증오로, 집착은 파괴로 번져간다.
영국 출신의 감독 에메랄드 페넬의 2026년판은 감정적으로 만족스러운 이야기라기보다는 시각적인 향연에 가깝다. 사랑을 낭만이 아닌 집착과 파괴의 감정으로 묘사한다. 계급과 욕망, 정체성 문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 그는 사랑을 낭만적 비극이 아니라 욕망과 권력의 문제로 접근한다.
영화는 황량한 요크셔 무어에서 시작한다. 폭풍이 몰아치는 밤, 한 여행자가 외딴 저택 '워더링 하이츠'에 머물며 과거의 비극이 회상 형식으로 펼쳐진다. 언쇼 가문은 어느 날 집 없는 소년 히스클리프(제이콥 엘로디)를 데려와 기른다. 그는 집안의 딸 캐서린 언쇼(마고 로비)와 강렬한 유대를 맺는다. 두 사람은 광활한 들판을 함께 달리며 세상과 단절된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그러나 히스클리프는 하인처럼 취급받으며 차별과 모욕을 견뎌야 한다. 특히 캐서린의 오빠 힌들리는 그를 노골적으로 학대한다. 성장한 캐서린은 히스클리프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사회적 지위와 안정된 삶에 대한 욕망도 품는다. 부유하고 세련된 청년 에드거 린턴이 등장하며 그녀의 마음은 갈라진다.
폭풍은 지나갔지만, 언덕 위의 그 흔적은 남아 있다. 그리고 우리는 또다시 묻는다. 사랑은 왜 이토록 잔혹한가. [Warner Bros. Pictures]
캐서린은 결국 “히스클리프를 사랑하지만 그와 결혼하면 비참해질 것”이라는 판단 아래 에드거와 결혼하기로 결심한다. 이 사실을 엿들은 히스클리프는 깊은 상처를 안고 집을 떠난다. 그의 부재는 단순한 이별이 아니라 복수의 서막이 된다.
몇 년 후, 히스클리프는 신비롭게 큰 재산을 가진 남자로 돌아온다. 그는 과거 자신을 멸시했던 이들에게 차례로 복수를 시작한다. 힌들리를 파멸로 몰아넣고 린턴 가문을 경제적으로 압박하며 감정적으로 캐서린을 괴롭힌다. 그러나 복수의 중심에는 여전히 캐서린에 대한 뒤틀린 사랑이 자리한다.
캐서린은 갈등과 죄책감, 그리고 억눌린 감정 속에서 점점 쇠약해진다. 히스클리프와의 재회 장면은 영화의 정점으로,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한 사랑과 증오를 동시에 터뜨린다. 결국 캐서린은 출산 후 세상을 떠난다. 히스클리프는 그녀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는 “유령이라도 좋으니 돌아와 달라”고 절규하며 광기에 가까운 집착을 보인다.
이야기는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의 딸과 린턴 가문의 아들을 이용해 또다시 복수를 이어간다. 그러나 젊은 세대는 점차 증오의 사슬에서 벗어나려 한다. 결국 히스클리프는 늙고 병든 채, 캐서린의 환영을 쫓으며 생을 마감한다. 마지막 장면은 폭풍이 멎은 언덕 위, 서로의 영혼이 자유롭게 걷는 듯한 두 인물의 이미지로 마무리된다.
마고 로비는 강력한 오스카상 후보로 거론될 것이 분명하다. 복합적인 캐릭터 캐서린의 심리 연기가 높은 평가를 받았다. [Warner Bros. Pictures]
영화는 처음부터 감정을 최고조로 밀어붙인다. 두 사람은 이미 타오르고 있으며 카메라는 그 불길을 확대한다. 몽타주와 클로즈업이 인물의 내면을 대신하고, 서사는 종종 장면의 강렬함에 종속된다. 화면은 아름답다. 무어의 바람, 촛불이 흔들리는 실내, 비에 젖은 얼굴은 고딕적 매혹을 완성한다.
브론테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인간의 어리석음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버리면서도 집착하고, 증오로 자신을 갉아먹는 나약함. 사랑은 구원이 아니라 파괴가 될 수 있다는 … . 복원 대신 해체를 택한 선택은 분명 의도적이다. 하지만 이 폭풍은 뿌리보다 파장을 강조한다.
영화는 사랑이 왜 파멸로 기우는지 묻지만, 그 심연까지는 내려가지 않는다. 페넬은 사랑을 낭만의 영역에서 끌어내려 욕망의 구조 속에 배치한다. 계급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감정을 왜곡시키는 힘으로 작동하고, 히스클리프의 분노는 단순한 실연의 고통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부정당한 자의 상처처럼 제시된다. 다만 그 분노가 충분히 축적되기 전에 장면은 다음 격정으로 넘어간다.
원작은 사건보다 분위기, 행위보다 심리의 잔향을 탁월하게 묘사한 역작이었다. 하녀 넬리의 시점을 통해 전개되던 소설은 언제나 한 발짝 떨어진 거리에서 인물들을 관찰하게 만들었다. 그 거리감은 아이러니를 낳으며 인간의 어리석음을 드러냈다. 반면 영화는 거리를 과감히 지우고 감정의 한복판으로 뛰어든다. 눈부시게 화려한 미장센에도 불구하고, 브론테가 남긴 불타는 사랑, 그 영혼의 깊이는 표면 아래로 밀려난 느낌이다.
캐서린은 여전히 매혹적이다. 그녀는 들판을 질주하는 망아지처럼 거칠고 자유롭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면서도 그 선택의 결과를 감당하지 못하는 인물. “나와 히스클리프는 하나”라는 선언은 그래서 더욱 비극적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녀의 내적 균열을 충분히 탐색하지 않는다. 욕망과 두려움, 허영과 사랑이 교차하는 복합적 심리는 때때로 장면의 미학 속에 묻혀 버린다.
히스클리프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분명 매혹적이고 위태롭지만, 악마적 집요함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단축된다. 소설 속 히스클리프는 인간의 나약함과 잔혹함이 극단으로 치달은 인물이었다. 사랑을 잃은 뒤, 그는 사랑을 복수심으로 파괴하는 존재가 된다. 복수는 타인을 향하지만 동시에 자기 파괴로 귀결된다.
눈부신 풍경과 젖은 입맞춤, 거칠게 몰아치는 음악, 서로를 집어삼킬 듯한 시선들. 결국 영화는 사랑은 왜 스스로를 파괴하면서까지 지속되는가, 인간은 왜 이미 버린 것을 다시 붙잡으려 하는가라는 질문에 귀착한다. 브론테는 아마 인간 내면의 어둠을 응시하려 했을 것이다. 페넬의 영화는 완전히 침잠하지는 않지만 그 어둠의 가장자리를 맴돈다.
폭풍은 지나갔다. 그러나 언덕 위의 흔적들은 그들의 영혼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우리는 또다시 묻는다. 사랑은 왜 이토록 잔혹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