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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주의 고려, 또 다른 500년] 빼어난 문장으로 애국하고도 부당한 권력에 부역 오명

중앙일보

2026.02.26 07:12 2026.02.26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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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 집권기에 재상 지낸 문신 이규보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
고려 말, 최영은 용맹스러운 장수, 용장(勇將)이었다. 체격이 크고 힘이 장사였으며, 전투가 벌어지면 언제나 앞장서 싸우고 후퇴하는 법이 없었다. 이성계는 덕이 있는 장수, 덕장(德將)이었다. 온화한 성품으로 아랫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고, 군사들이 그의 부하가 되고 싶어 했다. 용장·덕장 외에도 지략에 밝은 장수, 지장(智將)이 있다. 이 셋의 우열을 가리는 일은 부질없지만, 운이 따르는 장수, 복장(福將)이 이들보다 한 수 위임은 분명하다. 앞의 셋은 노력해서 도달할 수 있지만 복장은 그렇지 않다. 하늘이 도와야 한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어느 시대에 태어나서 어떤 사람들과 살아갈지는 아무도 선택하지 못한다. 그저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할 뿐, 그 성패는 시운(時運)에 따라 좌우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동명왕편』의 저자로 유명한 이규보(1168~1241)는 시운이 따르지 않은, 불운한 사람이었다.

평생 시와 술 가까이, ‘이당백’ 별명
임금 앞에서 만취, 탄핵당하기도

10대에 술에 맛 들여 급제·임용 늦어
무신 최우 천거로 공직, 뒤늦게 출세

뒷배 티 안 내고 검소한 삶 살았지만
70, 80년대 어용지식인으로 소환도

이규보는 전쟁 중 피란 수도 강화에서 사망해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에 묘가 있다. [사진 국가유산청]
이규보는 고려 무신 집권기의 대표적인 문신이자 시인이며 문장가이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문장을 잘 지어 신동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누구도 소년 급제를 의심치 않았지만, 정작 그는 과거의 예비고사 격인 국자감시에 합격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었다. 16세부터 응시했으나 번번이 낙방하고 4수 끝에 겨우 합격했다. 10대부터 술 마시기를 좋아했고, 재주를 믿고 공부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꿈에 노인이 나타나 이번 시험에서 장원을 할 것이라고 알려주면서 자기가 규성(奎星, 28개 별자리 가운데 하나)이라고 했다. 이 꿈을 믿고 ‘규성이 알렸다’라는 뜻으로 ‘규보(奎報)’라고 개명했는데, 과연 장원으로 합격했다는 것이다. 뒤에 만든 이야기겠지만, 합격을 바라는 간절함만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국자감시의 장원일 뿐이었고, 바로 이어진 예부시에는 거의 꼴찌로 급제했다. 재수를 하려 했으나 아버지의 꾸짖음과 주변의 만류로 어쩔 수 없이 홍패(紅牌, 과거 합격증)를 받아들었다.

청년의 천재성 드러난 ‘동명왕편’
이규보의 묘지명. 1241년 9월 이규보가 세상을 떠난 뒤 11월에 이수(李需)가 썼다. 가로·세로 106.5x66.4㎝, 두께 4㎝.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어렵사리 급제했지만 새로운 고생이 시작되었다. 고려의 과거는 관리가 될 자격을 줄 뿐이고, 급제자는 관직 임명이라는 또 하나의 관문을 넘어야 했다. 그런데 이규보가 급제했을 때는 무신정변이 일어난 지 20년이 지난 뒤로, 무신들이 활개 치는 세상에서 문신으로 입신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규보는 급제하고도 오랫동안 관직에 임명되지 못했다. 결혼해서 가정을 꾸렸으나 물려받은 재산도 없는 데다 관직도 없으니 생활고에 시달릴 것은 뻔했다. 그는 뒷날 “집에 자주 식량이 떨어져 끼니를 잇지 못했다”고 술회했다. 이 고난의 시기에 동명왕의 고구려 건국을 소재로 한 대서사시, 『동명왕편』을 지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이후 잊혀가던 고구려 전통을 되살리고,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의 문화적 자부심을 드러낸, 26세 청년의 천재성이 드러난 작품이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살림이 피지는 않았다.

30세가 되던 1197년에 최충헌이 이의민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았다. 최충헌은 유능한 문신들을 우대하는 것으로 이전의 무식한 권력자들과 다름을 보이려 했다. 이규보도 그의 눈에 들어 관직을 얻었다. 전주 사록(司錄)이라는 미관말직이지만, 급제 후 9년 만에 얻은 첫 관직이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상급자와 불화한 나머지 2년도 못 가 파직되고 말았다. 다시 2년 뒤 운문(경북 청도)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그곳에 달려갔다. 민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우고 벼슬을 얻을 속셈이었다. 하지만 정작 일이 끝나자 논공행상에서 이름이 빠졌다. 전주에서처럼 주위 사람들과 융화하지 못한 때문이었다. 그 뒤로 여전히 가난에 시달렸다. 식량을 마련하기 위해 겨우내 입던 털옷을 저당 잡히기도 했는데, 그때 신세를 한탄하면서 “술 좋아하고 절제가 없어 마시면 천 잔씩 퍼마셨고, 평소 품고 있던 말도 취하면 참지를 못해, 죄다 내뱉고 말았을 뿐 비방이 따를 줄 몰랐네. 처신이 이러하니 궁핍이 너무도 당연하지”라며 자책했다.

취해 쓴 시가 일품
이규보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 동국(東國)은 고려, 이상국(李相國)은 이씨 성을 가진 재상이란 뜻이다.
이규보의 인생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두 가지가 시와 술이었다. 그는 평생 8000수의 시를 지어 고려시대 문인 중 최다작이었고, 당나라 시인 이백에 빗대 이당백(李唐白)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동시에 그는 고려의 대표적인 애주가로서 술에 관련된 일화를 수도 없이 남겼다. 10대에 이미 술맛을 알았고, 과거 급제 때 성적이 안 좋았던 것도 시험장에서 술에 취했기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스스로 자책했듯이 술에 취하면 할 말을 참지 못해 실수한 적도 많았고, 노년에는 임금 앞에서 하사주에 인사불성이 되어 업혀 나오는 바람에 탄핵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술에 취해 시를 짓는 취중작(醉中作) 솜씨가 일품이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규보의 이런 능력을 가장 먼저 알아준 사람은 최충헌의 아들 최우였다. 그는 아버지보다 ‘한사(寒士, 궁핍한 선비)’를 더 우대했고, 유능하지만 궁핍한 이규보에게 당연히 주목했다. 이규보를 최충헌에게 추천하면서 “이 사람은 술을 마시지 않으면 시를 짓지 못합니다”라고 했고, 취하도록 마시고 시를 짓게 했는데 최충헌이 그 시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감탄했다고 한다. 이 덕에 최충헌의 천거를 받아 처음으로 제대로 된 문관직을 얻었는데, 과거 급제 후 23년 만이었고 나이는 46세였다.

최충헌에 이어 최우가 최고 권력자가 되면서 이규보 앞에 탄탄대로가 열렸다. 출발이 늦었던 탓에 동년배보다 관직은 낮았지만 승진을 거듭했다. 게다가 1219년부터는 몽골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작성하면서 문장가로서의 능력도 발휘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최우의 그늘 아래서만 가능했다. 임금 앞에서 만취한 죄로 탄핵을 받았을 때도 최우가 무마해준 덕에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최우 정권 내부에서 벌어진 권력 투쟁에 휘말려 관직에서 쫓겨나 멀리 섬으로 유배를 가기도 했는데, 최우의 사소한 의심 때문이었다. 그러다 1231년부터 몽골의 침략이 시작되면서 이규보에게 마지막 기회가 찾아왔다. 외교문서를 쓸 사람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전쟁 중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일은 칼 대신 붓을 들고 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이 일을 하기에 이규보만 한 사람이 없었다. 65세에 복직된 뒤로는, 심지어 70세에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몽골에 보내는 문서는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당연히 보상도 뒤따랐다. 관직은 계속 올라 재상이 되었고, 말년까지 최우의 보살핌을 받다가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행운아였나, 불운했나
최우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진각국사 혜심(慧諶)의 비석. 윗부분은 떨어져 나가고 아랫부분만 남아 있다. 이규보가 비문을 지었다. [사진 국가유산청]
이규보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피란 수도 강화도에서 토지도 집도 장만하지 않았으며, 가난했던 젊은 시절의 생활 태도를 평생 바꾸지 않았다. 재상이 되고서도 겨울에 땔감이 떨어지자 “여름에 얼음 없이 더위를 보냈는데 겨울에 숯 없다고 추위를 걱정하랴”라며 자위했다. 최우를 믿고 경솔하게 처신하지도 않았다. 수도 누릴 만큼 누렸으니 그만하면 만족스러운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이규보를 불운하다고 말하는가? 그는 최충헌·최우의 지우에 힘입어 출세하고 능력도 맘껏 발휘했지만 이후 역사에서 최충헌 부자가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바람에 한 일이 모두 허사가 되고 말았다. 조선시대에 조광조는 이렇게 혹평했다. “이규보는 문장에 능하기는 하나 최충헌에게 빌붙었다. 최충헌이 권력을 휘둘러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운데도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붙좇기에 겨를이 없었다.” 그랬다. 그는 자기를 써준 은혜에 감사할 뿐 그들의 잘못된 행동을 한 번도 지적하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1970, 80년대 군사정권 아래서 어용 지식인의 역사적 사례로 소환되기까지 했다. 세 살 때 일어난 무신정변이 그의 피할 수 없는 시운이었고, 부당한 권력에 봉사했다는 오명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최충헌 부자가 아니었으면 이름을 알릴 수조차 없었던 것을. 출처(出處), 즉 나가고 들어감에 있어 “도(道)가 있으면 벼슬하고, 도가 없으면 숨는다”(『논어』태백편)는 원칙이 있지만, 옛사람의 이상일 뿐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어떤 시운에서 세상에 나오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자세는 최소한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이 글을 쓰면서 김용선 교수(한림대)의 저서, 『생활인 이규보』(일조각, 2013)를 많이 참고했다.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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