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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남훈의 이코노믹스] 혁신 통해 파이부터 키우고 시장 역동성 살려야

중앙일보

2026.02.26 07:14 2026.02.26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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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혁명과 신(新)러다이트의 위협을 넘는 국가 전략
권남훈 산업연구원 원장
인공지능(AI) 열풍이 거세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AI 발전을 억제해야 하느냐는 논쟁이 활발했지만, 이제 세계는 거대한 AI 인프라 투자와 패권 경쟁의 한복판에 서 있다. 알파벳·아마존·메타·마이크로소프트·오라클 등 초대형 데이터센터를 운영하는 5대 AI 빅테크(하이퍼 스케일러)의 올해 자본 지출 계획만 5600억 달러에 달한다. 이는 세계 30위권 국가의 국내총생산(GDP)에 해당하는 엄청난 규모다.

기술 충격 극복하려면 사회 시스템의 빠른 진화와 적응 수반돼야
러다이트 이후 영국, 복지 확충과 규제 철폐로 새 산업·일자리 키워
노동의 유연성을 높이되, 탈락자 재교육과 사회 안전망은 두텁게
노동자의 암묵지를 자본이 가져갈 수도…조세 제도 선제적 개편을

김경진 기자
AI의 영역도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생성형 AI를 넘어, 스스로 판단하여 연속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에이전트 AI’가 등장했고, 최근에는 제조 현장에 투입되는 ‘피지컬 AI’로 확장되고 있다. 올해 소비자가전쇼(CES)에서 공개된 휴머노이드 로봇은 현대차 노조의 반발로 이어지며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일부에서는 이를 ‘노-로(노동자와 로봇) 갈등’의 시작이나 19세기 러다이트 운동의 재현으로 보기도 한다.

정말 AI와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시대가 온 것일까. 미래를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변화가 끝난 이후까지 대비를 미룰 수도 없다. 기술 발전의 궤적을 돌아보며, 우리 사회가 어떤 준비에 나서야 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AI, 인간 고유 영역을 대체 혹은 보완
기술은 인간이 일하는 방식과 상호작용하며 발전해 왔다. 경제학자 브래드퍼드 들롱(Bradford DeLong)은 인간이 가치를 창출하는 방식을 팔다리(물리적 힘), 손가락(정밀 조립), 입(정보 전달과 오락), 두뇌(계산과 통제), 정신(창의력과 문제 해결), 미소(즐거움과 교감)의 여섯 가지로 분류했다.

기술의 발전은 이 가운데 일부를 대체하거나 보완해 왔다. 굴착기의 등장은 삽을 든 인부의 수요를 줄였지만, 운전자에게는 엄청난 생산성 향상을 가져다주었다. 팔다리나 손가락의 노동은 기계가, 입의 역할은 통신과 미디어가, 두뇌는 컴퓨터가 대체 또는 보완하였다. 정신과 미소만큼은 인간만의 고유 영역이라 믿었으나, AI는 이 경계마저 흔들고 있다. 인간 못지않은 추론 능력을 발휘하고, 미소와 공감 능력마저 모방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AI 역시 ‘대체’와 ‘보완’의 두 경로를 따를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과 한국은행의 공동 연구에 따르면, 한국 근로자의 약 절반이 AI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전망이다. 그중 절반은 AI에 밀려나는 ‘대체 압력’에 직면할 것이지만, 나머지 절반은 AI를 도구로 생산성과 소득이 높아지는 ‘보완 효과’를 누릴 것이다.

AI가 바꿀 직업과 노동의 운명
어떤 직업이 소멸하고 어떤 직업이 살아남을 것인가. 노동경제학자들은 직업을 구성하는 ‘직무(Task)’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AI는 유형화하기 쉬우면서 시간과 비용이 드는 초벌 번역, 기초 코딩, 데이터 정리, 계약서 검토와 같은 업무를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 직무가 주로 이런 일들로 채워져 있다면 위험이 크다. 반면, 다양한 직무 중에도 AI가 하기 힘든 복합적 판단이나 역할이 포함되어 있다면 AI는 든든한 무기가 된다. 현금자동입출금기(ATM) 도입 이전에 은행의 창구 직원은 대부분 시간을 단순 출납업무에 사용했다. 경제학자 제임스 베센(James Bessen)에 따르면 ATM이 도입된 후에도 은행 직원의 고용은 전혀 줄지 않았는데, 남는 시간을 고객 상담, 대출 설계와 자산 관리에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업무시간의 구성보다는 직무의 특성이 중요함을 보여주는 사례다.

AI가 주니어 수준의 업무를 주로 대신하면서 청년들이 숙련도를 높일 ‘경험의 사다리’를 걷어찬다는 우려도 있다. 실제로 스탠퍼드 대학의 최근 연구에서는 미국에서 AI 노출도가 높은 직업군의 20대 대졸자 고용이 16%나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지만, AI의 위협이 저숙련 청년에게 집중되리라는 예상은 섣부른 측면이 있다. 여러 초기 연구는 AI의 도입으로 인해 저숙련자와 고숙련자 간의 업무능력 격차가 줄어들었다는 결과를 제시한다.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의 데이비드 오터(David Autor) 교수는 단기적으로는 AI의 덕을 볼 고급 인력이라도 AI가 잠식하는 직무 범위가 넓어지고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수요의 급감을 겪을 수 있다고 말한다. 승자와 패자를 단정하기는 쉽지 않다.

좀 더 근본적으로 AI가 노동과 자본의 균형을 무너뜨릴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철학자 마이클 폴라니(Michael Polanyi)는 “우리는 설명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안다”라는 말로 인간의 ‘암묵지(Tacit Knowledge)’를 정의하였다. 이는 명시된 규칙만 따를 수 있는 기존의 자동화 기술이 인간의 암묵지를 대체하지 못했던 이유를 설명한다. 하지만, AI는 데이터와 관찰을 통해 숙련공의 노하우를 스스로 학습해 낸다. 온전히 노동자가 소유했던 암묵지가 기업의 서버(자본)로 고스란히 복제될 수 있다면 노동과 자본의 대체성은 극대화될 것이다. 이는 과거 토마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에서 주장했던 자본 승리와 불평등 확산의 시나리오를 떠올리게 한다.

19세기 러다이트 운동의 진짜 교훈
AI 혁명이 노동자에게 적응의 고통과 불평등의 심화 같은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음은 분명하다. 이 지점에서 러다이트 운동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를 무지한 노동자들이 벌인 촌극으로 치부해선 곤란하다. 역사가에 따르면 당시 시위에 나선 숙련공들은 기계 자체를 거부한 것이 아니었다. 새롭게 도입된 기계가 누구나 다룰 수 있는 저숙련용이어서 기존 숙련공의 지위가 크게 위협받게 된 것에 반발하였다. 오랜 숙련의 가치가 위협받고, 승자와 패자가 갈린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AI 효과와도 닮은 점이 있다.

러다이트 시위는 진압되었지만, 그것이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았다. 영국 사회가 안정을 되찾은 것은 19세기 중반 복지 제도가 확충되고 불합리한 규제 철폐를 통해 새로운 산업과 양질의 일자리가 창출된 이후였다. 기술 진보의 거대한 수레바퀴를 힘으로 멈추려 한 시도는 무모했다. 하지만, 기술의 충격을 극복하려면 사회 시스템의 빠른 진화와 적응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 러다이트 운동의 진정한 교훈이다.

AI 시대에 어떤 대비가 필요한가
AI는 산업 전반을 뒤바꿀 범용기술(General Purpose Technology)이다. 인프라 구축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어느 순간 경제 구조 전체를 급격히 재편하는 특성을 가진다. 막대한 자본이 AI 인프라 구축에 투자되고 있는 지금이 다가올 충격에 대비하는 골든타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준비가 필요한가.

첫째, AI 도입을 통한 생산성 혁신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빠른 기술 발전의 흐름과 국가 간 무한경쟁 속에서 기득권을 지키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역으로 보면, 나눌 수 있는 파이를 빠르게 키우는 편이 그래도 손실을 줄이거나 없앨 여지를 만든다.

둘째, 파괴적 혁신과 신시장의 창출이 가능하도록 신산업 규제는 과감히 풀면서, 데이터 재산권 등은 명확히 해야 한다. 기술로 인간의 영역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고용 증가의 돌파구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직업’을 만들어내는 시장의 역동성뿐임은 역사가 증명해 왔다.

셋째, 노동시장의 ‘유연안정성(Flexicurity)’을 추구해야 한다. 직무 변화에 따른 인력 재배치가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노동의 유연성을 높이되, 탈락한 이들을 위한 재교육과 두터운 사회적 안전망이 동반되어야 한다. 쉽지 않다면 적어도 AI로 인한 변화에 대응한 맞춤형 제도 개선이라도 추진해야 한다.

넷째, 교육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지식 축적 위주에서 벗어나 AI가 복제할 수 없는 고차원적인 비판적 사고력과 정서적 역량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빠른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평생학습과 단기 인증제도의 활성화 등도 필요하다.

다섯째, 조세 제도의 선제적 개편이다. 한편으로는 기업의 AI 투자를 촉진하면서도 노동에서 자본으로 부의 축이 이동하는 데 대비한 세제 개편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기업의 투자세액공제와 자본소득세 등의 구조변화, 서민과 중산층의 자산 형성 촉진 강화 등을 추진해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기존의 규제나 이해관계자 간의 갈등에 매몰되어 우물쭈물하고 있다가는 닥쳐올 충격을 맨몸으로 맞아야 할 수도 있다. 국가적 차원에서 치밀하고도 대담한 전략을 빠르게 추진해야 하는 이유다.

권남훈 산업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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