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은 2009년 호적상 남자인 트렌스젠더도 성폭행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성염색체가 남성이라면 형법상 부녀로 볼 수 없다”며 성폭행이 성립하지 않는다던 판례를 뒤집은 것이다. 달라진 시대와 법 감정을 반영한 획기적 판례로 꼽힌다. 이 판례로 법망을 피해가던 성범죄자들을 처벌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앞으로 이런 판결을 한 판사는 감옥에 갇힐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26일 판사 등을 겨냥해 최대 징역 10년에 처할 수 있는 법왜곡죄(형법 개정안)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켰기 때문이다.
법왜곡죄는 형사사건의 판사와 검사, 경찰 등이 ‘법령의 적용 요건이 충족되지 아니함을 알면서도 이를 적용하거나, 적용돼야 할 법령임을 알면서도 이를 적용하지 않은 경우’ 처벌한다. 이창현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앞으로 판례 변경을 시도했다가는 수사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재경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형사사법의 디스토피아가 열렸다”고 했다.
IMF 사태 때 굶주린 자녀를 위해 음식을 훔친 주부들에 대해 검찰은 기소유예(죄가 되지만 재판에 넘기지 않음) 제도를 활용했다. 이런 선처 역시 극히 어려워진다. 한 노동자가 사무실의 450원짜리 초코파이를 먹었다고 재판에 넘겨진 ‘초코파이 절도 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법의 눈물이 사라지는 것”(부장판사 출신 변호사)이다.
이날 형법 개정안엔 간첩죄 대상을 ‘적국’에서 ‘외국 또는 이에 준하는 단체’로 넓히는 내용도 포함됐다. 국민의힘이 추천한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 천영식 상임위원 후보자 추천안은 민주당 반대로 부결됐다. 반면에 민주당이 추천한 고민수 상임위원 후보자 추천안은 가결됐다.
법왜곡죄 도입으로 형사사법의 전반적인 왜곡이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가 일고 있다. 우선 판사와 검사, 경찰을 상대로 한 끝나지 않는 고소·고발전이다. 수사나 재판 결과에 대한 불만이 있는 범죄자 등이 판사와 검사, 경찰을 괴롭히기 위해 법왜곡죄를 걸면 되기 때문이다. 법왜곡죄로 고소·고발하고, 법왜곡죄 수사가 불기소로 끝나면 이를 또다시 법왜곡죄로 걸어 괴롭히는 무한 고소·고발이 가능하다.
법왜곡죄의 구성 요건이 모호하다 보니 고소·고발을 남발하더라도 무고죄를 적용하기 어렵다. 법원행정처 역시 법안 검토 의견서에서 “동일한 사건에 대해 수사와 재판이 되풀이돼 수사기관의 직무 수행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판사나 검사를 비롯해 공무원을 대상으로 하는 직권남용 고발 건수는 2023년 기준 2만7985건으로, 2018년(1만3738건)보다 2배가량으로 늘어났다. 김현 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은 “사실상 마음에 안 드는 판검사 괴롭히기처럼 악용되고, 엄청난 비효율을 초래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범죄 혐의를 발견한 후 기소하지 않았다가는 법왜곡죄로 처벌될 수 있기 때문에 검찰이 소년범이나 생계 곤란 범죄 등에 대해 재량권을 활용하기 어려워진다. 지난해 12월 법무부 업무보고에서 ‘초코파이 절도 사건’에 대해 “이런 걸 왜 기소했느냐”던 이재명 대통령의 지적이 무색해지는 상황이다.
판례에 반하는 공소 제기나 하급심 판결도 나오기 어려워진다. 법무부는 “시대 변화를 반영하기 위한 판례 변경은 검사가 적극적으로 공소를 제기하고 상소를 해야 가능한데, 이는 법률 적용의 왜곡이 될 수 있다”며 “법이 수사기관의 방어적·소극적 직무수행을 조장할 것”이라는 법안 의견서를 냈다. 법원도 “새로운 시대상을 반영한 전향적 판결의 등장이나 소수자에 대한 인권 보호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수사기관이나 법원이 증거를 조작·인멸하는 등의 중대범죄를 저질렀을 때는 증거인멸 등 기존 형법 조항을 통해 처벌할 수 있다. 그런데도 법왜곡죄를 도입하는 배경을 두고 “여당과 결이 다른 판사와 검사를 괴롭히려는 의도가 있다”(부장검사 출신 변호사)는 분석이 나온다.
경찰과 변호사들마저 법왜곡죄 반대 의견을 내놓는 실정이다. 경찰청은 “경찰관을 상대로 무분별한 고소·고발 남용 우려가 있다”는 의견을 국회에 제출했다. 대한변호사협회 역시 “입법부와 행정부는 사법부의 독립적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는 성명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