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오후 7시 반 서울 서초구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K클래식의 기념비적 명장면이 펼쳐졌다. 김선욱(38), 선우예권(37), 조성진(32), 임윤찬(22) 등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피아니스트 4명이 한 무대에 올랐다. 축구로 치면 메시·호날두가 한 팀으로, K팝으론 BTS와 블랙핑크가 함께 공연한 것에 비유됐다.
이렇게 ‘어벤져스급 피아니스트들’이 모여 개성과 화합을 드러낸 것에 대해 해설을 맡은 조은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100년 후 한국 음악사를 회고할 때 특별히 기록될 전례 없는 앙상블”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현대차그룹은 이날 ‘이어지는 울림’을 주제로 아산 정주영(1915~2001) 현대그룹 창업주 서거 25주기 추모 음악회를 열었다. 고인의 장손인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클래식계 4대 천왕’을 한자리에 모은데 대해 “몇 년 전 김선옥 피아니스트와 이번 연주회를 기획하게 됐다”며 “만약 할아버지께서 이런 구상을 아셨다면 ‘뭘 망설여, 해봐!'라고 하셨을 것”라고 말해 관객으로부터 웃음과 박수를 받았다. 정주영 창업주는 생전에 "이봐, 해봤어?"라며 도전을 독려한 것으로 유명하다.
정 회장은 “할아버님의 모든 도전은 언제나 사람에서 시작했다. 사람의 가능성을 찾으셨고 사람을 위한 혁신을 이뤘다”고 말했다. 이어 “고등학교 시절 눈이 오고, 꽃이 피면 할아버님께서 시를 지어 낭독해 보라고 하셨던 기억이 난다”며 고인을 추억했다.
음악회는 김선욱과 조성진이 한 대의 피아노 앞에 나란히 앉아 슈베르트의 ‘내 손을 위한 환상곡’을 선보이면서 막을 올렸다. 다음으로 선우예권과 임윤찬이 짝을 이뤄 라흐마니노프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 2번’을 연주했다.
하이라이트는 인터미션(중간 휴식) 중 무대 위에 피아노 네 대가 놓이면서 예고됐다. 첫 곡은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 서곡’이었다. 선우예권이 먼저 건반을 두드리자 곧이어 다른 세 사람이 물결처럼 화답하며 음의 층위를 두텁게 쌓아 올렸다. 이후 점차 긴장감이 고조되더니 클라이맥스에서는 폭발하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네 사람은 치밀하면서 담백하고, 정제되면서도 담대하게 각각의 존재감을 살리면서도 한 몸처럼 요동치며 곡의 흐름을 유려하게 완성했다.
조은아 교수는 “원래 100여 명이 연주하는 대형 오케스트라 곡을 네 명의 피아니스트가 마흔 개의 손가락으로 치열하게 성취해낸 것”이라며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드는 정주영 창업주의 개척정신을 연상케 한다”고 부연했다. 강원도 통천에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정주영 창업주는 부두 하역 노동자로 시작해 국내 건설·자동차·조선 산업의 기틀을 세웠다고 평가받는다.
피날레는 리스트의 ‘헥사메론’이었다. 연주가 끝나자 네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으며 격려했다. 추모 분위기에 맞춰 검은 색 정장과 넥타이 차림으로 무대에 등장했던 이들은 그제야 벅찬 감정을 드러냈다. 음악계에 따르면 이날의 빅 이벤트는 ‘맏형’ 격인 김선욱의 주도로 3년 전 시작됐다. 출연진 선정, 프로그램 구성 등을 주도하면서 사실상 음악감독 역할을 했다는 후문이다.
네 명은 모두 현대차정몽구재단이 매년 강원도 평창에서 여는 ‘계촌 클래식 축제’에서 연주한 이력이 있다. 특히 김선욱과 조성진은 2024년 한 대의 피아노로 듀오 연주를 하며 호흡을 맞췄는데, 이때 정 회장도 직접 관람했다.
김선욱은 연주 직후 “말보다 오래 남는 음악을 통해 그분의 삶과 정신, 그리고 그분이 남긴 시대의 무게를 관객들과 함께 조용히 되새길 수 있어 더욱 의미 깊었다”며 “네 명의 피아니스트가 서로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호흡 속에서 무대를 함께 만들어갈 수 있었던 시간 또한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연주회에는 정몽준 아산재단 명예이사장 부부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등 현대가(家) 일가는 물론 정재계, 소방·보훈·복지 관계자, 미래 인재, 현대차그룹 임직원 등 각계 인사 2500여 명이 초청됐다.
이재명 대통령 부인 김혜경 여사는 연주가 끝난 후 3분 넘게 기립 박수를 보냈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 우원식 국회의장,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홍라희 리움미술관 명예관장, 이서현 삼성물산 사장, 김재열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집행위원,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성악가 조수미, 배우 유해진 등이 자리했다. 장재훈 부회장, 호세 무뇨스 사장 등 현대차그룹 임직원도 함께 했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그룹의 비전인 ‘휴머니티를 향한 진보’는 정주영 창업주의 사람 중심 경영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며 “현대차그룹은 앞으로도 지속적인 혁신을 통해 인류의 풍요로운 삶과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노력을 이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