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재 법원행정처장이 어제(27일) 조희대 대법원장에게 사퇴 의사를 전달했다. 거대 여당이 위헌 논란에도 아랑곳 않고 법왜곡죄 법안을 시작으로 재판소원 도입 법안, 대법관 증원 법안 등 이른바 ‘사법 3법’을 밀어붙이자 직을 던지며 반발한 모양새다. 이런 가운데 정청래 민주당 대표는 공개적으로 조 대법원장의 자진 사퇴를 압박했고, 여당 일각에선 조 대법원장 탄핵 추진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법원행정처장은 대법원장의 지휘를 받으며 전국 법원의 인사·예산·조직 등 사법행정 사무 전반을 총괄하는 핵심 보직이다. 박 처장의 사퇴는 지난달 천대엽 대법관 후임으로 법원행정처장에 취임한 지 42일 만으로 전례가 드물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해 5월 당시 이재명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을 유죄 취지로 파기 환송했는데, 민주당은 그 사건의 상고심 주심이던 박 처장이 임명되자 사퇴를 거론해왔다. 이런 가운데 민주당의 3법 강행이 박 처장의 사퇴를 촉발한 것으로 법조계에선 보고 있다.
그동안 사법부는 민주당의 사법 3법을 저지하기 위해 나름 총력전을 펼쳤지만 역부족이었다. 법원행정처는 3법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자료를 내기도 했다. 지난 25일에는 전국법원장들이 회의를 갖고 “(사법 3법은) 신속한 재판과 기본권 보장에 역행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논의 과정에 사법부 등의 참여가 필요하다”고 촉구하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여당은 사법부의 줄기찬 요구를 끝내 묵살했다. 국민의힘 의원들이 필리버스터로 견제에 나섰지만, 민주당은 판사와 검사가 법을 왜곡해 적용할 경우 최장 징역 10년을 선고할 수 있는 법왜곡죄 도입 법안을 지난 26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어제는 대법원 확정판결도 헌법재판소가 번복할 수 있도록 하는 재판소원 도입 법안을 처리했고, 28일에는 현재 14명인 대법관 정원을 현 정권 임기 내에 26명으로 늘리는 대법관 증원 법안도 강행할 예정이다.
여당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조희대 사법부 체제’ 자체를 흔들고 있다. 정청래 민주당 대표는 어제 오전 “조희대 사법부의 불신이 사법개혁의 원동력이 된 것이 사실”이라며 퇴진론을 제기했다. 그 이후 박 처장의 사퇴 소식이 전해지자 정 대표는 SNS에 “사표 낼 사람은 조 대법원장이다. 사법 불신의 원흉, 조 대법원장은 즉각 사퇴하라”는 글을 올려 압박 수위를 높였다. 민주당 의원들은 박 처장의 대법관직 사퇴를 요구하고, 조 대법원장 탄핵 카드까지 거론한다. 이처럼 여당이 다수 의석을 앞세워 위헌성이 다분한 사법 3법을 밀어붙이고 사법부 수장의 사퇴까지 공개적으로 압박하는 것은 우리 헌정 질서의 토대인 삼권분립 정신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대법원과 전국 법원장들이 한 목소리로 “국민의 피해가 우려된다”고 호소하는데도 여당이 사법 3법을 마음대로 처리하는 입법 폭주는 국민을 위하는 모습이 아니다. 정권에 유리하게 사법 제도의 틀을 일방적으로 바꾸면 결국 사법부 독립이 훼손되고 국민의 재판 신뢰는 땅에 떨어질 것이다. 그 결과는 돈 없고 권력 없는 일반 국민의 심대한 피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법원행정처장이 항의성 사직을 하고 대법원장 거취까지 압박받는 상황이 되자 일각에선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의 ‘사법 파동’이 일어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제기한다. 이제 사법 3법의 위헌성을 바로잡을 기회는 이재명 대통령의 거부권에 달렸다. 당리당략을 넘어 국가통합의 대승적 차원에서 이 대통령의 결단이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