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평창군 방림면에 위치한 인구 2000여명의 작은 산골 마을, 계촌. 서울에서 차로 약 2시간 거리인 이곳은 국가대표급 피아니스트 김선욱(38), 선우예권(37), 조성진(32), 임윤찬(22) 등 4명을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분모다.
지난 25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서거 25주년 추모 음악회는 한국 클래식 음악계에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다. 이들 4명이 같은 무대에 선 게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100년 후, 한국의 음악사를 돌이켜 봤을 때 특별히 기록될 무대”라는 조은아 경희대 교수의 평가가 과장이 아니라는 의미다. 조 교수는 “(연주자들의) 이름이 공개되자 ‘어떻게 모았지, 어떻게 이런 조합이 가능하지’라며 음악계가 놀랐다”라고 전했다.
이들을 묶은 인연이 뭘까. 바로 ‘계촌 클래식 축제’다. 계촌은 2009년 계촌초등학교 별빛오케스트라, 2012년 계촌중학교 별빛오케스트라가 창단되면서 예술 마을로 발전해갔고 2015년 정몽구 재단이 예술적 가치를 지닌 지역 마을에 활기를 불어넣는 ‘예술마을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전환점을 맞았다. 이후 정몽구 재단이 주최,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주관하는 야외 클래식 축제가 매년 열리며 강원 밤공기를 피아노 선율로 가득 채웠다.
이들 네명은 모두 계촌 클래식 축제에 참여한 이력이 있다. 선우예권은 2019년, 임윤찬은 2022년, 김선욱과 조성진은 2024년에 각각 무대에 올랐다. 특히 김선욱·조성진은 앙코르 공연으로 한 대의 피아노에 나란히 앉아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5번’을 함께 깜짝 연주해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당시 정주영 창업주의 장손인 정의선 현대차 회장도 직접 계촌을 찾아 이들의 연주를 감상했다. 재계 관계자는 “이런 공통분모가 정 창업주 추모 음악회에서 4명을 한 자리에 모을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고 전했다.
이번 추모 음악회의 절정은 네 대의 피아노 버전으로 새롭게 편곡된 바그너의 ‘탄호이저 서곡’과 리스트의 ‘헥사메론’ 연주였다. 탄호이저 서곡은 중세 기사 탄호이저의 전설을 바탕으로 인간 내면에서 충돌하는 성스러움과 세속적 욕망을 그려낸 곡이다. 통상 100여명이 연주하는 대형 오케스트라지만, 이들은 단 마흔 개의 손가락으로 재해석했다. 여섯 명의 작곡가가 참여해 완성된 헥사메론 역시 피아노 6대와 관현악이 어우러진 대규모 편성으로 연주되는 작품이지만, 이번 무대에선 피아노 네 대로 연주할 수 있도록 과감하게 재구성됐다.
‘네 대의 피아노 연주’를 선보이자는 아이디어는 정의선 회장이 냈다. 그가 부회장을 맡기 전, 기아차 사장으로 재임하던 2009년 3월 아내의 권유로 관람한 한 피아노 연주회가 모티브가 됐다. 당시 63살이었던 ‘피아니스트 거장’ 백건우는 21살이었던 김선욱을 비롯해 24살 김태형, 19살 김준희 등 3명의 후배와 무대에 올라 네 대의 피아노 협연을 선보였다. 독특한 구성으로 호평을 받은 공연은 탄호이저 서곡을 시작으로 미요의 ‘파리 모음곡’, 체르니의 ‘콘체르탄테’ 등이 차례로 연주됐다. 모두 네 대의 피아노에 맞게 편곡된 버전이었는데 정 회장은 그때를 회상하며 “큰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14년 뒤인 2023년 정의선 회장은 부회장을 거쳐 현대차그룹 회장으로 올라섰고 김선욱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겸 차세대 지휘자로 성장했다. 두 사람은 네 대의 피아노 연주를 정 창업주 25주기 추모 음악회에서 다시금 재현하기로 했다. 물론 4명의 일정을 조율하고 프로그램하기는 쉽지 않았다. 정 회장은 “할아버님에게 기획을 물어봤다면 ‘이봐! 뭘 망설여, 해봐!’라고 했을 것”이라며 결심 배경을 밝혔다.
이후 구체적인 기획은 김선욱이 이끌었다. 사실상 ‘음악 감독’ 역할로서 연주자를 모으고 프로그램 구성을 주도했다고 한다. 1988년생인 김선욱은 1989년생 선우예권, 1994년 조성진, 그리고 2004년생 막내 임윤찬과 프로젝트를 준비하며 맏형으로서 리더십을 발휘했다고 알려졌다. 젊은 피아니스트들이 모인 만큼 편안한 분위기에서 소통하고 아이디어를 발전시켜나갈 수 있었다는 후문이다. 김선욱은 2021년 KBS교향악단 정기공연으로 지휘자에 데뷔했고 지난해 말까지 4대 교향악단 중 하나인 경기필 예술감독으로 활동하는 등 지휘자로서 경력을 쌓아가고 있다.
4명의 젊은 연주자는 연주를 끝내고 서로를 끌어안았고 정의선 회장을 비롯해 객석을 가득 채운 2500여명의 관객은 기립박수로 화답하며 세기의 공연으로 남을 추모 음악회는 마무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