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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시선] 부풀려진 한국 vs 동남아 누리꾼 간 '온라인 설전'

연합뉴스

2026.02.27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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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시선] 부풀려진 한국 vs 동남아 누리꾼 간 '온라인 설전'

(자카르타=연합뉴스) 손현규 특파원 = 지난해 7월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 부임한 뒤 가장 먼저 받은 문화적 충격은 아파트 단지 안에서 처음 본 현지인들이 건네는 인사였다. 기자에게 한 인사가 맞나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면 매번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디서 봤지"라고 혼자 머릿속을 되짚어 본 적도 있지만, 그런 '낯선 인사'를 받는 경우가 정말 잦았다. 아파트 보안요원과 청소 직원은 물론이고 현지인 주민 대부분이 아무렇지 않게 선뜻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그들은 항상 웃는 얼굴이었다.
처음 본 외국인에게 웃으며 먼저 인사를 건네는 인도네시아인들에게 적응하기까지는 시간이 제법 걸렸다. 어느 순간 쭈뼛쭈뼛 인사를 같이하기는 했지만, 어색하게나마 함께 웃기까지는 또 몇개월이 더 지나야 했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아도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면 인사를 거의 하지 않는 한국 문화에 너무 오래 익숙해진 탓이었다.
최근 한국과 동남아시아 누리꾼들이 엑스(X·옛 트위터)와 스레드(Threads) 등 온라인 소셜미디어에서 크게 설전을 벌였다.
발단은 지난달 31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K팝 밴드 '데이식스'의 콘서트에서 일어났다.
멀리서 고화질 사진을 찍으려던 한국인 팬이 공연장 반입이 금지된 망원 카메라(이른바 '대포 카메라')로 촬영하려 했고, 현지 보안요원이 제지하자 실랑이를 벌이는 사진이 엑스에서 퍼졌다.
이후 "(공연을 방해한) 한국인 팬의 무례함에 화가 났다"는 현지인 게시물에 한국 누리꾼들이 "한국 팬 문화를 존중해야 한다"며 맞받아치면서 설전이 확산했다.
동남아인을 비하하는 한국 누리꾼들의 인종차별적 발언이 이어졌고, 말레이시아 누리꾼들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와 태국 누리꾼들까지 합세해 한국의 성형문화, 높은 자살률, 영어 수준 등을 비꼬았다.
동남아(Southeast Asia) 형제자매(siblings)를 뜻하는 '시블링(#SEAbling)'이라는 해시태그도 게시물마다 달리면서 어느새 '한국 vs 동남아' 구도가 형성됐다.
일부 한국 언론은 'SNS 전면전', '온라인 키보드 전쟁', '한국 제품 불매 운동 조짐'과 같은 자극적인 제목으로 "동남아에서 집단적 반한 감정이 생기고 있다"고 전했다.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동남아 언론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동남아 형제들 결집: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누리꾼, 한국에 맞서 연대' 같은 제목의 기사로 마치 국가 대항전을 중계하듯 이번 설전을 보도했다.
그러나 이런 보도들은 온라인 공간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현상을 지나치게 부풀려 해석한 측면도 있다.
온라인 공간에서는 익명성에 기대어 실제 오프라인보다는 더 과장되고 과격한 표현을 서슴지 않는다. 또 자극적인 게시물이 알고리즘을 타고 빠르게 확산하면서 '디지털 민족주의'와 같은 집단 감정으로 결집하기 쉬운 곳이 온라인이기도 하다.
실제로 주변 인도네시아인들에게 이번 '온라인 설전'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처음 듣는 이야기"라거나 "혐오 글을 봤지만, 큰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는 대답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서로 얼굴을 모르는 온라인 공간이 원래 그런 곳"이라며 "꼬투리를 하나 잡아서 편을 가르고 서로 싸움을 부추기면서 재미를 찾는 곳"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을 악용해 팔로워 수를 늘리려고 한국인으로 속인 가짜 계정이 등장했다는 의혹도 나왔다.
이번 설전 이후에도 여전히 자카르타에 있는 한국 몰에는 주말마다 많은 인도네시아인이 몰렸다. 이들은 다양한 한국 제품을 샀고, 몰 지하에 한국 거리를 본떠 만든 곳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아파트에서 만난 인도네시아인들은 이번 설전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들의 따뜻한 표정도 그대로였다.
다행히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에서 최근에 한국인을 상대로 혐오 범죄가 발생했다는 소식도 아직은 들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번 온라인 설전이 그냥 가볍게 넘겨도 될 일은 결코 아니다. 사소한 일로 시작돼 온라인 공간에서 분출한 디지털 민족주의가 자칫 국가 간 외교 갈등이나 한국 제품 불매 운동으로 번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번 온라인 설전을 보며 아파트에서 만나는 인도네시아인들에게 이제는 좀 더 '따뜻한 인사'를 먼저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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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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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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