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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원섭의 와칭] '레이디 두아', "진짜가 뭔지 알기는 해?" 라는 질문

중앙일보

2026.02.27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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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레이디 두아'에서 사라킴을 연기한 신혜선. 사진 넷플릭스
‘진짜와 가짜’에 대해 이야기하려다 보니 요즘도 여기저기서 꽤 자주 인용되는 ‘시애틀 추장의 연설’이 떠오릅니다. 1850년대, 미국 워싱턴 주에 살던 북미 원주민 추장 시아흘(Si'ahl)은 ‘서부 개척’이란 이름을 걸고 쳐들어온 백인들로부터 “땅을 팔고 떠나라”는 통보를 받습니다. 제안이 아니라 강요였죠. 억울했지만 생존을 위해 떠나기로 결심한 추장은 ‘부디 우리가 떠나도, 조상들의 넋이 어린 이 땅을 소중히 다뤄달라’는 당부를 남깁니다.

오늘날 전해지는 이 추장의 연설문은 구구절절 자연과 인간에 대한 통찰로 빛납니다. ‘어떻게 저 하늘이나 땅의 온기를 사고팔 수 있는가? 공기의 신선함과 물의 반짝임은 우리의 소유가 아니다.’ ‘생명의 그물망을 짜는 것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은 모든 생명을 연결한 그물망의 한 가닥일 뿐이다.’ 워싱턴 주의 대도시 시애틀(Seattle)은 바로 이 추장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래서 이 글은 ‘시애틀 추장의 연설’이란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환경의 중요성을 알리는 글에 널리 인용되고 있습니다.

물론 한 가지만 빼면 완벽합니다. 한국에까지 잘 알려진 이 연설문의 작가가 시애틀 추장 본인이 아니라, 1970년대 미국의 시나리오 작가 테드 페리라는 점만 빼면 말입니다.
'시애틀 추장의 연설'을 담은 사라 젠킨스의 동화책. 지금도 시애틀 추장의 연설은 수많은 판본으로 출판되고 있지만, 테드 페리가 실제 저자라는 사실을 다룬 책은 없다. 사진 아마존 홈페이지


내가 아니라고 해도 믿지 않는 세상

페리는 1971년 한 환경 다큐멘터리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이때 과거 시애틀 추장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내레이션용 원고를 작성합니다. 그런데 워낙 글을 잘 쓴 덕분에, 여기 감명을 받은 사람들이 그 내용을 여기저기 퍼 나르기 시작한 거죠. 뒷날 이 글은 교과서에도 실리는 고전이 됩니다.

페리는 여러 차례에 걸쳐 그 글은 자신이 쓴 것이며, 시애틀 추장의 원문이 아니라고 밝히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미 대중은 ‘위대한 연설을 남기고 쓸쓸히 떠나는 추장’의 신화에 심취해 있었던 겁니다. 많은 사람이 이 이야기를 이용해 자신들의 논리에 힘을 더하던 상황이라, 이 신화가 깨지는 건 아무도 원치 않았던 거죠.

이렇게 잘 만든 가짜는 진짜 이상의 힘을 갖습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레이디 두아(극본 추송연, 연출 김진민)’도 바로 이런 가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형사 박무경(이준혁)은 어느 겨울날 용모를 알아볼 수 없게 망가진 변사체를 수사하던 중, 시체의 신원이 사라 킴(신혜선)이라는 증언을 확보합니다. 하지만 그 사라 킴이라는 인물은 이름만 있을 뿐, 출생도, 학력도, 성장 과정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빈 껍데기였던 거죠. 사라 킴은 ‘0.01%의 상류층만이 접할 수 있다’는 프랑스제 명품 백 ‘부두아’의 한국 지사장을 자처하며 어느 날 갑자기 서울 패션가에 등장했는데, 수사가 진행되면서 부두아라는 명품 역시 사라 킴 만큼이나 전혀 근원이 없는 물건이란 사실도 드러납니다.

유능한 사기꾼들의 이야기는 최근 여러 차례 세계적인 화제작이 되었습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애나 만들기’는 2013년 뉴욕을 떠들썩하게 했던 실존 인물인 애나 소로킨의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호텔 직원들이 “100달러 지폐를 휴지처럼 팁으로 뿌렸다”고 증언한 소로킨은 유럽의 엄청난 집안 상속녀라고 주장하며 공익재단 설립을 가장해 수백만 달러의 투자를 받았다가 꼬리가 밟혔죠. 디즈니 오리지널 ‘드롭 아웃’은 한때 여자 스티브 잡스라 불렸지만, 결국 사기꾼으로 드러난 엘리자베스 홈즈의 이야기입니다.
미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테라노스 스캔들'을 담은 디즈니 플러스 드라마 '드롭 아웃'. 사진 디즈니 플러스


전복의 쾌감, 동질감, 그리고 단죄를 바라는 심리

사람들은 왜 이런 드라마를 좋아할까요. 사실 이런 이야기들은 꽤 큰 ‘뒤집기’의 쾌감을 줍니다. 왕과 귀족이 사라진 현대 사회에서도 소위 상류층은 자신들만의 벽을 쌓고, 그 안에서 교양과 부와 세련된 취향을 독점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기꾼들은 그 공고한 벽이 얼마나 허술한가를 보여주고, 일반 관객들에게 ‘그래, 그 잘난척 하던 것들도 사실 별것 아니었어’ 하는 쾌감을 느끼게 해 줍니다.

아울러 시청자들은 ‘사실 나도 현실의 나보다 나은 나로 포장해 보려고 한 적이 있었지’라는 묘한 죄책감과 함께, ‘그래도 나는 저런 사기꾼은 아니야’라는 도덕적 우월감을 동시에 느끼게 됩니다. 어느 정도 동질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그 사기꾼들이 단죄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느끼는 것이죠.

'애나 만들기'나 '드롭 아웃'과 마찬가지로, ‘레이디 두아’도 한국에서 있었던 실제 사건을 모델로 하고 있습니다. 2006년을 떠들썩하게 했던 가짜 명품 시계, ‘빈센트 앤 코’ 사건입니다. 당시에도 많은 사람이 ‘잘 알려지지 않은 스위스제 최고급 명품’이라는 마케팅에 현혹되어 원가 10만원짜리 시계를 수천만 원에 사곤 했습니다. 현실과 차이가 있다면 드라마 속의 부두아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 성황을 누리게 됩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레이디 두아'. 사진 넷플릭스


너는 구별할 수 있나? 구별할 의지는 있나?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 사건으로부터 20년, 이 세상에선 진짜와 가짜의 벽이 더욱 엷어졌다는 걸 말하려는 게 작가의 의도는 아닐까요. 시애틀 추장의 연설처럼, 이제는 ‘이거 내가 만든 가짜에요’라고 양심 고백을 해도 사람들은 ‘이게 그럼 네 거라고? 헛소리 집어치워!’하고 입을 막아버리는 일도 놀랍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추송연 작가의 "진짜와 구별할 수 없는데 가짜라고 할 수 있나요"라는 말은, 결국 가짜의 완성도(엄밀히 말해 극중의 부두아는 사실 '가짜'는 아니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별할 능력도, 의지도 없어진 세상에 대한 고발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물론 이 이야기가 지금처럼 대중의 호응을 받게 된 데에는 ‘표면의 오만함과 그 아래 감춰진 열등감’을 동시에 설득력 있게 연기한 신혜선의 공로가 절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디서든 2026년의 드라마 여우주연상을 뽑을 일이 있다면, 지금까지는 신혜선에게 한표를 던지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네요.




송원섭([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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