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트트랙 선수의 꿈을 키우는 아들들을 위해 미국의 평범한 이민자 가족은 천 리 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주말마다 수백㎞를 달려 한국 출신 레전드가 가르치는 수업을 듣게 했다. 몇 년 뒤에는 아예 기러기 가족이 되기로 했다. 어머니가 아들들을 데리고 다른 주로 떠나 본격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미국판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그렇게 탄생한 쇼트트랙 가족의 막내아들이 생애 두 번째 올림픽 무대를 마쳤다.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에서 미국 쇼트트랙 국가대표로 활약한 앤드류 허(25·한국명 허재영)를 지난 20일 이탈리아 밀라노 시내에서 만났다. 부모님과 형, 형수 그리고 외삼촌 내외까지 대가족이 총출동했다는 앤드류 허는 “처음 나간 2022년 베이징 대회는 출전 자체만으로 감사했다. 이번에는 반드시 메달을 따겠다는 목표로 왔는데 결과가 아쉽다”면서도 “대회 기간 많은 응원을 받았다. 특히 한국의 팬들로부터 생각지도 못한 따뜻한 메시지가 많이 왔다. 이번 대회를 통해 내 뿌리는 한국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고 웃었다.
미국에서 태어난 앤드류 허는 한국어가 익숙하지는 않다고 했다. 듣기에는 문제가 없지만, 말할 때 독특한 억양이 자꾸 튀어나와 한국말을 잘 쓰지 않는단다. 이날 인터뷰에서도 초반에는 영어를 구사하면서도 이따금 간결한 한국어 문장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곁을 지킨 아버지 허덕진(56)씨와 어머니 김혜영(54)씨의 통역 도움도 컸다. 이들은 한국 국적이 아닌 아들의 인터뷰가 혹여 오해를 살까 걱정도 했지만, 평생 추억으로 남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온가족이 함께 자리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각각 3살과 중학생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둘은 학창시절 만나 사랑을 싹 틔웠고, 1996년 결혼해 펜실베니아주 워링턴에서 두 아들을 낳았다. 가족은 앤드류 허의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자동차 정비 사업을 물려받아 평범한 일상을 꾸렸다. 허덕진씨는 “우리 가족은 운동과는 큰 연이 없었다. 그러던 중 메릴랜드주 실버스프링에서 거주하는 친척으로부터 ‘여름방학 쇼트트랙 캠프가 있으니 아들들을 보내라’는 연락이 왔다. 운동을 시킬 겸 아내가 형제를 데리고 간 것이 전환점이었다”고 했다.
허씨가 ‘전환점’이란 단어를 쓴 이유는 당시 캠프 지도자 때문이다. 아이들을 가르치던 이는 다름 아닌 한국 쇼트트랙의 레전드 김동성(46) 코치. 미국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던 김 코치에게 형제가 우연히 보내진 것이다. 처음에는 형만 쇼트트랙을 배웠지만, 동생의 잠재력을 알아본 김 코치가 부모를 설득해 형제를 쇼트트랙의 길로 이끌었다. 이후 어머니 김혜영씨가 주말마다 왕복 6시간 거리를 운전하며 원정 수업을 다녔다.
앤드류 허는 “나는 사실 쇼트트랙을 할 생각조차 없었다. 형이 쇼트트랙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옆에서 롤러브레이드만 탔다. 그런데 코치님이 나의 힘과 재능을 알아보시고 입문을 적극적으로 권유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형제의 재능을 확인한 가족은 결단을 내린다. 쇼트트랙 인프라가 좋은 유타주로의 이사였다. 직장을 떠날 수 없는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가 아들들을 이끌고 떠나기로 했다. 앤드류 허는 “유타주로 떠난 뒤에도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가 살이 붙으면서 힘이 생겨 실력이 쑥쑥 늘었다. 그렇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어느새 국가대표가 됐다”고 말했다.
앤드류 허의 성장기는 중국 고사에서 유래한 맹모삼천지교를 떠올리게 한다. 김혜영씨는 “우리가 가정형편이 어려운 편은 아니더라도 기러기 가족처럼 사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아들들이 너무나 쇼트트랙 선수가 되기를 원해서 어쩔 수 없이 남편과 떨어져 지내야 했다”고 말했다.
앤드류 허 패밀리는 쇼트트랙 대가족이다. 형인 애런 허(27·한국명 허재원)는 청소년 국가대표 출신으로 2016 릴리함메르 동계유스올림픽에서 활약했다. 애런 허의 반려자인 에이프릴 신(28·한국명 신비)도 이 대회를 함께 뛴 쇼트트랙 선수 출신이다. 형 내외는 동생의 이번 올림픽 여정을 함께했다.
형을 따라 성장한 앤드류 허는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을 보며 본격적으로 국가대표의 꿈을 키웠다고 했다. 특히 당시 대회에서 활약한 한국 선수들이 큰 동기부여를 줬다. 이때 많은 영감을 안긴 이호석(40)과 이정수(37), 곽윤기(37)는 이후 사적으로 가까워진 선배들이기도 하다.
앤드류 허는 “곽윤기 형은 나를 보더니 ‘삼촌으로 부르라’고 농담부터 던졌다. 또, 박인욱(32) 형은 내게 먼저 다가와 친구처럼 지내자고 해서 금세 가까워졌다. 다만 친하게 지냈던 (故) 노진규 형은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나 슬프다”고 했다.
4년 전 베이징에서 남자 1000m 7위를 기록했던 앤드류 허는 이번에도 입상권에는 들지 못했다. 남자 1500m 11위, 남자 500m 13위로 만족했다. 남자 5000m 계주 결승까지는 올라가지 못했다. 앤드류 허는 “너무나 아쉽다. 계획한 대로 경기력이 나오지 않았다. 자신감도 있었는데 결과가 따라주지 않았다”면서 “원인은 미국으로 돌아가서 더 분석해야 한다. 다음 올림픽에는 꼭 메달을 따도록 하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비록 원하는 성적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부모의 눈에는 아들이 그저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두 차례 연속 올림피언이 돼 세계무대를 빛냈기 때문이다. 허덕진씨는 “아들이 세계 정상급 선수들과 기량을 겨룬다는 자체만으로 뿌듯하다. 예전에는 포기할 만한 상황에서도 이제는 과감히 도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대견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웃었다. 김혜영씨는 “아들 경기도 마음 졸이며 지켜봤지만, 한국 선수들의 플레이도 열심히 응원했다. 특히 여자 3000m 계주에서 금메달을 딸 때는 정말로 기뻤다”고 말했다.
끝으로 앤드류 허는 “이번 대회를 통해 내 뿌리가 한국임을 다시 느꼈다. 현장에서도 그렇고, 개인 소셜미디어를 통해서도 한국 팬들로부터 많은 응원을 받았다. 4년 뒤에도 이런 응원을 받으면서 다시 뛸 수 있기를 바라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