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이후 40년간 유지된 현행 사법체계가 격변을 맞게 됐다. 국회는 지난 28일 여당 주도로 대법관 증원법(법원조직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는 것을 마지막으로 사법 3법(법왜곡죄 도입·재판소원법·대법관 증원법) 처리를 마쳤다. 이에 반발한 박영재 법원행정처장은 전날 사의를 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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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급심 약화 우려" 속도 조절 요구에도 강행
이날 통과된 대법관 증원법은 현행 14명인 대법관 수를 26명으로 늘리는 법안이다. 2028년부터 매년 4명씩 증원해 2030년까지 총 대법관 12명을 증원하게 된다. 이재명 대통령은 임기를 마치는 2030년 6월 이전에 퇴임하는 대법관들의 후임을 포함해 모두 22명의 대법관 임명권을 갖게 된다.
상고심 적체 해소를 명분으로 한 입법이지만 대법관 증원에 따른 연쇄 효과로 핵심 인력이 대법원으로 쏠리고, 결과적으로 전체 사건 적체를 오히려 악화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나왔다.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대법관은 1명당 법관 경력 14년차 이상인 재판연구관(법관) 8.4명을 두고 있다. 대법관 12명 증원은 1·2심 판사 100여명을 대법원으로 빨아들이게 되므로 하급심 약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판사 100명은 2025년 기준 부산지방법원 전체 판사 수(96명)보다도 많은 숫자다.
이같은 이유로 법원 안팎에서는 속도 조절론이 우세했지만 민주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난달 25일 전국법원장회의는 “단기간 내 다수 증원은 사실심 부실화 등 부작용으로 인해 국민들의 피해가 돌아갈 우려가 있다”며 우선 4명을 증원하고 그 영향을 살펴 추가 증원을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지난 9월에도 법원장들은 “증원의 전제로서 혹은 병행하여 사실심(1·2심)에 대한 충분한 인적·물적 지원이 선행돼야 한다”고 했다.
수도권의 한 부장판사는 “그러지 않아도 재판을 잘하는 법관들이 점차 법원을 빠져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경력이 풍부한 판사들이 대거 대법원으로 가고 나면 1·2심 재판은 부실해질 수밖에 없다”며 “대법관 증원으로 대법원이 재판을 더 잘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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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전엔 민주당이 "사법부 장악 음모" 주장
대법관 증원 논의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10년에도 한나라당 주도로 대법관 20명으로 늘리는 증원안이 추진됐지만, 당시엔 민주당이 “사법부 장악 음모”라고 몰아붙였다. 박일환 당시 법원행정처장이 성명을 내고 “사법부를 배제하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진행방식은 부적절하다”고 반발했고 논의 끝에 계획은 결국 백지화됐다. 김명수 대법원장 시절 대법원이 먼저 ‘상고제도 개선 TF’를 통해 4명 증원을 제안했지만 국회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증원론에 다시 불이 붙은 건 지난해 5월 1일 이재명 대통령의 공직선거법 위반 파선을 전원합의체에서 유죄취지로 파기환송한 이후다. 민주당은 선고 다음날 ‘대법관 30명 안’(김용민 의원안)을, 같은 달 8일 ‘대법관 100명 안’(장경태 의원)을 있따라 발의했다. 법조인이 아니어도 대법관으로 임용될 수 있도록 하고 수를 30명까지 늘리는 안(박범계 의원안)도 나왔다가 철회됐다. 한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대법관 수 증원이 상고심 개선의 해법이었으면 진작 이뤄졌겠지만, 여러 부작용이 예상되니 4명 증원 등 신중론이 힘을 얻었던 것”이라며 “지금의 대법관 증원 논의는 정치적인 도구일 뿐”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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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만의 대법관 증원, 단일 전원합의체도 막 내리나
이날 법안 통과로 1987년 이후 14명을 유지했던 대법관 수는 39년 만에 바뀌게 됐다. 대법관 수는 1948년 해방 후 11명이었다가 1959년 대법관 9명과 ‘대법원판사’ 11명으로 운영되는 등 변천사를 겪었으나, 1987년 이후로는 줄곧 14명 체제였다. 2005년 비(非) 대법관인 장윤기 처장이 법원행정처장을 맡은 2년이 있었지만 12명의 대법관이 소부를 구성하는 구조는 유지됐다.
해방 후부터 유지된 미국식 단일 전원합의체(en banc) 제도도 약 80년만에 막을 내릴 가능성이 있다. 대법원은 그동안 모든 대법관이 참여하는 전원합의체와 3명 이상의 대법관이 심리하는 소부로 운영돼왔는데, 대법관 26명이 함께 사건을 심리하고 법령을 통일하는 건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법조계에서는 민사와 형사·행정 전원합의체를 나누는 방안이 거론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