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왕과 사는 남자’(장항준 감독, 이하 ‘왕사남’)가 개봉 26일 만인 1일 800만 관객을 돌파했다. 빠른 흥행 속도, 뚜렷한 경쟁작이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천만 영화 등극이 가시권에 들어왔다는 분석이다.
‘왕사남’은 강원도 영월로 유배 간 단종(박지훈)의 마지막 4개월을 그린 팩션 사극이다. 목숨을 걸고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른 엄흥도(유해진)라는 인물의 짧은 기록에 상상력을 덧입혀 만들었다.
눈물겨운 교감을 만들어낸 유해진·박지훈 두 배우의 열연이 흥행의 일등 공신으로 꼽힌다. 단종의 마지막을 궁중 암투가 아닌, 민초들의 시선에서 그려낸 서사의 힘 또한 큰 흥행 요인이다.
시대 순으로 볼 때, ‘왕사남’은 913만 관객을 모은 영화 ‘관상’(2013, 한재림 감독)의 후속편이다. ‘관상’은 수양대군(이정재)이 정변을 일으켜 어린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는 계유정난을 가공의 인물인 관상가 내경(송강호)의 시선에서 그렸다.
‘왕사남’은 폐위된 단종(노산군)이 강원도 영월로 유배 간 이후의 일을 그린다. 두 영화 모두 조선 초 최대의 비극을 소시민의 시각에서 그려내며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같은 시기를 배경으로 한 ‘몽유도원도’ 또한 연내 개봉 예정이다.
계유정난 소재의 영화들이 끊임없이 만들어지며, 관객의 마음을 잡아끄는 이유는 뭘까. 권력욕에 불타는 삼촌에 의해 왕위를 뺏기고 죽임을 당한 어린 왕의 스토리가 셰익스피어 비극 못지 않은 슬픔과 공감을 자아낸다는 분석이다.
‘왕사남’의 역사 자문을 맡은 김순남 교수(고려대 문화유산융합학부)는 “계유정난은 선(단종 옹위 세력)과 악(수양대군 세력)의 대결로 구분하기 쉬운 정변”이라며 “그런 이분법적 구도 때문에 극화하기 좋은 소재”라고 말했다.
역사에서 부당하게 희생된 인물의 서사에 감정 이입하는 우리 관객 성향과도 무관치 않다. 김형석 영화평론가는 “강자(승자)의 기록을 담은 역사와 달리, 영화에서 만큼은 약자(패자)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하는 관객의 욕구를 ‘왕사남’ 같은 영화들이 채워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비극의 역사가 끊임없이 되풀이되며 현재성을 갖는 것도 계유정난 서사의 매력으로 꼽힌다. 모두가 아는 이야기여서 부담스러워했던 장항준 감독이 연출을 결심한 계기가 된 작품은 ‘서울의 봄’(2023, 김성수 감독)이다.
‘왕사남’ 또한 ‘서울의 봄’처럼 역사의 희생자를 기억하고, 성공의 이면에 있던 불의를 잊지 말자는 메시지를 남긴다. 김 교수는 “역대 정권들이 정치적 이해에 따라 수양대군(세조)에 대한 평가를 달리 한 건, ‘성공한 쿠데타는 정당한가’라는 명제가 현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라며 “‘왕사남’을 보며 재작년 내란 사태를 떠올리는 관객도 적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수양대군, 한명회, 단종 등 세 인물을 영화적 상상력으로 새롭게 변주할 수 있는 것도 계유정난 소재 영화의 매력이다. ‘관상’에서 수양대군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한국 영화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등장 신으로 꼽힌다. 이정재는 권력욕과 카리스마 넘치는 수양대군을 연기하며, 그간의 ‘절대악’ 이미지를 씻어냈다.
‘관상’에서 냉혈한 책사(김의성)로 등장했던 한명회는 ‘왕사남’에선 기존의 왜소하고 음험한 이미지를 과감히 깨버린다. 유지태가 연기한 한명회는 큰 풍채와 위압감으로 스크린을 장악한다.
나약한 인물로 그려져 왔던 단종 또한 ‘왕사남’에서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장 감독은 단종이 어릴 때 총명하고 강단 있는데다, 활도 잘 쐈다는 기록을 토대로 새로운 단종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얼마 전 촬영을 마친 ‘몽유도원도’는 수양대군(김남길)과 안평대군(박보검)이 주인공이다. 천만 영화 ‘택시운전사’(2017)를 연출한 장훈 감독의 신작으로, 형(수양대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안평대군의 시선에서 계유정난을 새롭게 조명한다.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가 단순히 안평대군의 꿈을 그린 게 아니라, 안평과 수양의 엇갈리는 정치적 욕망과 갈등을 봉인한 그림이라는 설정 하에 형제 간 대결을 긴장감 넘치게 그려간다.
투자배급사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김남길·박보검 두 배우의 카리스마 대결이 관전 포인트”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