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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의 인사이드 아트] 예술가의 작업실, 워홀의 ‘팩토리’ 이후

중앙일보

2026.03.01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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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미술비평가·부산비엔날레 집행위원장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의 론 뮤익 전시에서 눈길을 끈 것은 익숙한 그의 작품보다 한편의 작업실 영상이었다. 제작에 몰입하게 만드는 작업실의 환경과 조각가의 탐구적 태도, 그리고 휴식 중 새와 교감하는 장면까지 인상 깊게 다가왔다. 작업실은 작품 이면에 놓인 작가적 삶의 흔적과 취향, 그리고 내면을 가식 없이 드러낸다. 큐레이터로서 오랜 시간 창작의 현장을 방문하며 확인한 것은 작가의 삶의 방식과 태도가 예술의 내용과 형식을 결정한다는 사실이었다.

영감과 노동 깃든 공방에서 탈피
제작·아카이빙·전시 기능 겸비한
기술 교류·협업 플랫폼으로 전환

론 뮤익 작업실 영상, 국립현대미술관 2025. [사진 이준]
많은 작가들에게 작업실은 자신만이 몰입할 수 있는 사유와 창작의 공간이자 작품의 보관창고이며, 이상을 실현하는 장소다. 제임스 홀은 『The Artist’s Studio: A Cultural History(예술가의 작업실: 문화사)』(2023)에서 작업실을 단순한 제작 공간이 아니라, 예술가의 신화와 현실이 모순적으로 교차하는 장소로 읽는다. 과거에는 천재의 영감이 깃드는 신화적 공간이자 고된 육체노동의 현장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작업실의 성격과 정체성이 다양하게 변형·확장·재구성되고 있다.

이 전환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것은 1960년대 앤디 워홀이 자신의 작업실을 ‘스튜디오’가 아니라 ‘팩토리’라 부른 순간이다. 그에게 예술은 더 이상 작가의 손작업만으로 완결되지 않는다. 반복과 복제, 협업과 유통이 창작의 일부가 되었고, 예술가는 장인이 아니라 생산을 총괄하는 감독이자 기획자가 되었다. 워홀 이후 제프 쿤스와 데미안 허스트, 그리고 올라퍼 엘리아슨의 스튜디오를 더 이상 ‘개인 작업실’이라고 할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때 작업실은 예술가 혼자만의 은신처가 아니라, 기획과 제작은 물론 협업과 공론, 토론이 함께 작동하는 시스템으로 변화한다.

백남준의 스튜디오는 이 변화를 또 다른 방식으로 증명했다. 한때 빈티지한 골동품과 전자부품이 뒤섞인 공방처럼 보이던 그의 작업실은, 2000년 구겐하임 회고전을 앞두고 방문했을 때 레이저 아트 같은 첨단기술을 실험하는 테스트베드로 확장되어 있었다. 그는 휠체어에 앉은 몸으로도 신문과 TV 화면을 번갈아 바라보며 시시각각 들어오는 뉴스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이미지와 정보, 기술과 매체가 교차하는 작업공간은 단순한 제작 현장이 아니었다. 그에게 작업실은 공방이 아니라 세계를 새롭게 구성하고 실험하는 장치였다.

오늘날 성공한 작가들이 선택하는 단독 스튜디오나 지식산업단지형 작업실은 점차 최적화된 시스템을 닮아가고 있다. 연구와 제작, 보존과 아카이빙, 전시는 물론 높은 천장과 넓은 출입구, 장비 이동과 물류 동선까지 고려하여 국제적 수준에 맞춰 운영된다. 예술은 여전히 사유에서 출발하지만, 그 실행은 점점 제작 시스템과 유통, 효율성의 논리에 의해 재편된다. 작업실의 변화된 풍경은 예술가의 삶의 방식뿐만 아니라, 예술이 어떤 조건에서 생산되고 관리되며 유통되는지를 함께 읽게 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예술가에게 작업실은 여전히 생존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임대료와 관리비, 장비와 재료비, 불규칙한 수입 사이에서 작업실은 로망이 아니라 버텨야 할 현장이다. 젊은 세대 작가들은 하나의 스튜디오에 정착하지 않고 국내외 레지던시를 오가며 유목주의처럼 이동하는 삶을 선택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들에게 작업실은 더 이상 고정된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교류와 협업, 현장 경험과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구성되는 임시 거점에 가깝다.

작은 작업실은 사유의 밀도를 말해주지만, 거대한 제작 단지는 예술이 산업과 자본, 시장의 논리 속에 깊숙이 편입되었음을 증언한다. 이동하는 스튜디오는 동시대 예술이 얼마나 유연하게 조건을 바꾸며 진화하는지를 보여준다. 오늘날 작업실은 ‘장소’라기보다 물질과 기술, 관계가 교류하는 플랫폼이 되어가고 있다. 팩토리에서 플랫폼 시대로의 전환은 작업의 방식뿐 아니라, 예술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적 조건 자체의 변화를 가리킨다. 비평에 있어서도 작업의 결과보다는 과정이, 무엇을 만들었는가보다, 어떤 방식과 태도, 어떤 윤리 속에서 작업이 이루어졌는지가 더 중요해졌다. 기술이 인간을 대체하는 인공지능 시대에 작업실은 또 하나의 전환에 서 있다.

이준 미술비평가·부산비엔날레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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