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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주의 혁신의 길] 정부의 6차 과학기술 청사진, ‘복기와 축적’ 제도화해야

중앙일보

2026.03.01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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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주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이번에는 다를까? 최근 이재명 정부의 과학기술 청사진을 그려낼 과학기술기본계획 수립위원회가 출범했다. 정부가 2026년 R&D 예산을 역대 최대인 35조3000억원으로 편성하며 연구 생태계의 복원을 선언한 만큼 현장의 기대감은 어느 때보다 높다. 단순히 예산 확대를 넘어, 연구 현장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성과를 축적할 수 있는 근본적인 변화가 기대되기 때문이다.

35.3조, 역대 최대 R&D 예산
과제중심제 폐지도 반갑지만
독일의 ‘정직한 진단’ 사례 참조
계획 집행과 평가구조 바꿔야

구혁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제1 차관이 지난해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2026년도 과기정통부 예산안’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기대감과 함께 기시감도 존재한다. 노무현 정부 이후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과학기술 청사진이 제시됐다. 성장동력과 전략기술이 새롭게 호명됐고, 기초과학과 인재 육성을 포함하는 국가혁신체제(NIS) 강화가 반복적으로 강조됐다. 정책은 늘 출발선에 선 듯 보였지만, 무엇이 작동했고 무엇이 실패했는지에 대한 치열한 복기는 실종됐다.

정부 바뀌면 연구 기획도 바뀌어
이 같은 정책 초기화를 가장 먼저 체감하는 곳은 연구 현장이다. 연구 주제가 궤도에 오를 즈음 과제가 종료되면, 연구자는 새로운 정부 기조에 맞는 주제를 찾아 다시 연구기획을 해야 한다. 장기적 문제의식보다 정책 성과로 설명하기 쉬운 주제가 선택되고, 연구의 언어도 ‘다음 공모’에 맞춰 조정된다. 이를 반복적으로 학습하면 연구자와 조직은 축적형 발전보다 유행하는 키워드와 대세 적응을 택하게 된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국가혁신체제 강화라는 구호가 반복될수록 현장의 냉소가 깊어졌다는 사실이다. 노무현 정부가 국가혁신체제를 국정 아젠다로 전면화한 이후, 역대 모든 정부의 기본계획은 예외 없이 ‘R&D 생태계 혁신’이나 ‘혁신체제 고도화’를 핵심 목표로 세웠다. 그러나 지난 25년간 무엇이 실제로 강화되었는지, 어떤 구조가 개선되었는지에 대한 성찰은 보이지 않았다. 진단 없이 처방만 반복되는 사이, 혁신 담론은 점점 설득력을 잃었다.

그럼에도 이번 제6차 기본계획을 향한 과학기술계의 시선에는 이전과는 다른 미묘한 기류가 흐른다. 지난 수십 년간 금기시되던 국가혁신체제의 해묵은 숙제, PBS(과제중심제도) 폐지라는 거대한 균열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예산 복원이라는 양적 회복과 함께 연구자가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최소한의 토대가 마련되었다는 의미로, “이번에는 다를 수 있다”는 기대가 생겨나는 이유다.

PBS 폐지는 출발점일 뿐
PBS 폐지는 출발점일 뿐이다. 제도의 한 축을 바꾸는 것과, 정책을 설계하고 운영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번 기본계획이 진정한 변화 도구가 되려면 계획을 만들고 집행하며 평가하는 구조까지 바뀌어야 한다. 그 실마리는 이미 혁신체제의 한계를 경험하고 이를 제도적으로 보완해 온 주요국의 사례에서 찾을 수 있다.

독일식 모델의 핵심은 정직한 진단에 있다. 지난해 독일 연구혁신자문위원회(EFI)는 강력한 연구 기반을 갖춘 독일이 최근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지는 이유로 행정 지연, 과도한 관료주의, 느린 정책 조정, 구체성이 부족한 미래 전략을 지목했다. 위원회의 진단은 문서로 끝나지 않았다. 이후 출범한 메르츠 정권은 흩어져 있던 기술 관련 조직을 연구·기술·우주부로 통합했고, 기동성을 핵심 가치로 내세웠다. 실패 요인을 공개적으로 복기하고 제도 개편의 동력으로 삼은 사례다.

일본은 최고 의결 기구를 통해 계획과 실행을 총괄한다. 총리가 의장을 맡는 종합과학기술혁신회의(CSTI)에서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예산 배분과 정책 평가까지 관장한다. 계획과 자원배분이 하나의 사령탑 안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정책은 자동으로 실행력을 확보한다. 그 결과 일본의 기본계획은 부처 간 합의 문서를 넘어 종합과학기술혁신회의가 책임을 지는 국가 차원의 중장기 전략으로 작동한다.

중국의 과학기술 5개년 규획은 이어달리기식 구조를 갖는다. 5년마다 새로운 규획이 시작되지만, 실제로는 이전 단계의 성과와 과제를 이어받아 다음 단계로 발전시키는 방식이다. 수립 과정에서는 당이 방향을 제시하고 주무 부처가 이를 구체화한다. 집행 과정에서는 중간 평가와 수시 점검을 통해 목표 달성도를 확인하고 필요시 조정한다. 올해 제15차 주기를 시작하는 중국의 5개년 규획은 하나의 정책 문서라기보다 국가 역량을 한 방향으로 모으는 운영 체계에 가깝다.

이처럼 주요국들은 복기와 축적을 통해 정책의 연속성을 제도화했다. 반면 우리는 정권 교체기마다 계획이 새로 시작되는 구조를 반복했다. 이제는 관성적인 계획 수립의 한계를 넘어설 시점이다.

과학기술은 시간이 자산인 장기 여정
그렇다면 제6차 과학기술기본계획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첫째, 지난 계획에 대한 정직한 복기를 제도화해야 한다. 지난 5년의 성과와 실패를 냉정하게 평가하고, 그 결과를 다음 계획의 출발점으로 명시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복기가 축적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둘째, 계획을 끝까지 완수할 책임의 중심을 분명히 해야 한다. 정책이 정권 주기에 따라 사실상 새로 짜이는 배경에는 책임 구조의 분산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부처 간 칸막이를 넘어서는 범정부적 조정 권한과 정치적 책임이 결합할 때, 기본계획은 선언을 넘어 국가 전략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셋째, 5년 계획을 고정된 문서가 아니라 점검과 조정을 전제로 한 살아 있는 계획으로 운영해야 한다. 급변하는 기술 환경 속에서 중간 평가와 수시 점검을 통해 목표를 수정하고 보완하는 유연한 구조가 필수다. 그래야 계획은 변화하는 현실을 반영하며 진화하는 전략이 될 수 있다.

과학기술은 시간을 자산으로 삼는 장기 여정이다. 연속된 도전의 경험이 쌓일 때 국가 경쟁력은 깊이를 갖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크고 멋진 구호가 아니라, 세대를 넘어 국가적 기술 자산을 축적해 나갈 설계도와 그 운영 체계다. 이번 제6차 기본계획이 과학기술계로부터 “이번에는 정말 달랐다”고 평가받기를 기대한다.

홍성주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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