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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중앙] 판타지 속 판타지를 찾아서 98화. 닭의 울음

중앙일보

2026.03.01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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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 부르고 새해를 깨우는 “꼬끼오”

옛날 옛적 어느 마을에 밤마다 사람을 괴롭히는 도깨비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힘들었지만, 신통술을 부리는 도깨비들을 어떻게 할 수 없었죠. 해가 지면 집에 숨어 도깨비가 지나가길 바랄 뿐이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급히 길을 가다 밤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느새 나타난 도깨비들이 주변을 둘러쌌죠. 그는 집에 가게 해달라고 빌었지만, 도깨비들은 오랜만에 만난 사람을 어떻게 괴롭힐지 상의할 뿐이었죠. 겁에 질려 떠는 사람에게 어느 도깨비가 “해가 뜨면 안 되잖아”라고 말하는 게 들렸습니다. 순간 꾀가 떠오른 그는 도깨비에게 여러 가지 제안을 던지기 시작했어요. 솔깃한 말에 도깨비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열중했죠. 시간이 점점 흐르고 어느 순간, 저 멀리 닭 울음소리가 들려왔어요.
한국화가 김경현의 2017년 작품 ‘사계장춘’은 마을을 한가로이 노니는 닭 일가의 모습을 통해 평화로운 삶을 잘 보여준다. ⓒ열린사회희망연대

도깨비는 놀라서 외칩니다. “닭이 울었다! 날이 밝았다!” 아직 하늘은 어두웠지만, 도깨비들은 더 머무르지 못하고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죠. 무사히 살아남은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이후 닭을 귀하게 여기며 새벽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닭이 울면 도깨비나 귀신이 떠나간다.’ 옛이야기에 많이 나오는 내용이죠. 그런데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왜 하필 닭이 울자 도깨비가 도망갔을까요. 솔직히 닭은 그다지 강한 동물로 보이지 않죠. 『브레멘 음악대』에서도 모든 동물 위에 올라갈 정도로 작고요. 이야기는 닭이 새벽을 알리는 동물이라는 점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아직 어두운 상황에서도 해가 뜨는 것을 느끼고 울음으로 알리는 것이죠.

닭은 하루의 흐름을 매우 잘 인식하는 동물입니다. 닭의 뇌에는 송과선이라는 빛을 감지하는 기관이 잘 발달해 해가 뜨기 전의 미세한 빛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죠. 닭이 울고 조금 지나 해가 떠오르니, 옛날부터 닭은 ‘태양을 부르는 존재’로 인식되었습니다. 중국에선 닭이 양기를 대표하는 존재라고 생각했어요. 빛의 신을 신봉한 조로아스터교에서는 닭이 울음으로서 ‘어둠과 악의 세력’을 몰아내고 태양의 빛이 세상에 돌아오는 것을 알리는 신성한 정령으로 여겼죠. 게르만 신화에 나오는 황금빛 닭 굴링캄비는 새벽을 알리는 것은 물론 라그나뢰크가 시작될 때도 울었다고 해요. 라그나뢰크는 구세계의 멸망을 뜻하는 전쟁이니, 결국 ‘새로운 시대의 새벽’을 알린 셈입니다.

하지만, 닭은 태양을 지배하지 않습니다. 그리스에서 태양신 헬리오스의 전차가 하늘로 날아오를 때 닭이 울지만, 실제로 닭이 전차를 모는 것은 아니죠. 닭 울음소리는 ‘이제 해가 떠오르니 하루를 준비하라’라는 신호, 자명종과 같습니다. 닭이 가축화된 것은 기원전 8000~6000년경. 농경이 시작되고 문명이 태동하던 시기와 같으니, 사실상 인류 문명과 함께한 최초의 시계인 셈이죠.

세계 각지에서 닭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모든 문명이 닭의 혜택을 얻은 것은 아니에요. 아스테카·마야로 대표되는 메소아메리카에는 닭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동물 단백질을 포함해 여러 영양이 부족했죠. 아스테카가 멸망한 것은 스페인의 침공, 나아가 그들이 가져온 전염병 때문이었지만, 만일 닭이 있었다면 그 멸망 과정이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몸이 지쳤을 때 따뜻한 음식을 먹고 기운을 회복하듯, 닭은 그런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먹거리였기 때문입니다.

근육을 단련할 때 닭가슴살을 즐겨 먹듯, 닭은 영양가가 높은 가축이죠. 소나 말, 돼지처럼 덩치가 크진 않지만 매우 빠르게 자라며 꾸준하게 알을 낳아 먹거리를 제공해요. 작다 보니 모이도 많이 필요하지 않은 데다, 작은 마당이나 심지어 상자 안에서도 기를 수 있어 정착민만이 아니라 말이나 배를 타고 이동하는 이들도 데리고 다닐 수 있습니다. 태평양에 사는 마오리족 신화를 바탕으로 만든 애니메이션 ‘모아나’에서 주인공과 함께 바다로 향하는 것이 ‘닭’인 것도 그런 면에서 자연스럽다 할 수 있죠.

인류 역사에서 닭은 그다지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소나 말처럼 크고 농사에 도움되지도 않고 개처럼 우리를 지키며 함께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죠. 하지만 닭은 문명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시계의 역할도 있지만, 바로 ‘달걀’ 때문이죠. 닭을 죽이지 않고 계속 얻을 수 있는 달걀은 훌륭한 식재료이며, 닭이라는 생명을 담은 그릇입니다. 알에서 세상이 생겨가는 신화는 세계 각지에서 찾을 수 있죠. 중국에선 세상의 재료가 된 거인 반고가 혼돈의 알에서 깨어났고, 핀란드에선 바다를 떠다니던 칼레발라의 우주 알이 깨지면서 하늘과 땅, 그리고 태양과 달, 별이 탄생합니다.

문명의 시작을 알리고, 문명을 지켜온 존재. 닭은 평화로운 문명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닭은 적은 먹이로도 잘 자라지만, 전쟁이나 혼란기에 기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죠. 작고 연약한 데다 겁도 많아서 위협에 약하거든요. 그러니 ‘새벽을 알리는 닭 울음소리’는 결국 ‘오늘도 평화롭다’라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일까요. 매년 정월에 첫 번째 맞이하는 ‘닭의 날(유일·酉日)’은 예로부터 새해의 또 다른 시작으로 환영받았습니다. 올해는 마침 2월의 마지막 날이 28일이 유일, 바로 새해를 알리는 닭의 날이었죠. 새해가 시작된 지도 꽤 지났지만 생각이나 바람이 잘 풀리지 않고 있다면, 닭의 날 이후 다시 한번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전홍식 SF&판타지도서관장



※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한은정([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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