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미국·한국 현장취재] 추방의 사각지대 (1) LA 출근길에 ICE에 체포 한살 아들, 아내 두고 추방 도착 직후 입영통지서 수령
캘리포니아 생활 20년 접고 훈련소 외로운 이방인으로 선교회 셸터가 유일한 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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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미주중앙일보의 영어 매체 코리아데일리US(www.koreadailyus.com)에 2025년 12월 19일 게재된 기사를 한글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세계십자가선교회 안일권 목사가 경기도 여주의 추방자 지원 셜터에서 논산훈련소로 떠나는 K.Y에게 기도를 해주고 있다.
수십 년을 미국에 살았어도 이 땅을 삶의 터전이라 생각할 수 없는 이들이 있다. 신분에 발목이 잡힌 한인들의 슬픔이다.
그들에게는 안착할 삶의 둥지가 없다. 추방이든 자진 출국이든 결국 자신이 나고 자란 한국으로 향해야 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밀려난 이들에게 고향 또한 ‘내 나라’로 온전히 다가오지 않는다. 그들은 한국에서도 여전히 이방인으로 살아간다. 미주중앙일보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불법체류자 단속으로 삶의 터전을 떠나야 했던 한인 추방자들의 궤적을 기록했다.
K.Y가 논산훈련소 입소를 위해 연병장으로 가고 있다.
28세의 K.Y는 익명을 전제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는 몹시 조급해 보였다.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지 않은 채 어디론가 계속 전화를 걸고 있었다.
한국 충청남도 논산시 육군 신병훈련소(2025년 9월 22일) 앞이다. 마이크를 통해 운동장에 울려 퍼지는 한국어 안내 방송은 조급해하는 K.Y의 마음을 더욱 재촉하고 있었다.
“훈련병들, 이제 연병장으로 집합하세요.”
K.Y는 ‘집합’이라는 한국어를 정확히 알아듣지 못하는 듯했다.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도 전화기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머리를 짧게 자른 신병들이 함께 온 부모와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 운동장으로 뛰어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그는 그제야 입소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알아차린 듯했다.
그가 끝까지 듣고 싶었던 것은 LA에 살고 있는 아내의 목소리였다. 혹시라도 전화를 받는다면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들어 있을 한 살배기 아들의 모습을 영상으로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었지만, 끝내 연결되지 않았다.
못내 아쉬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는 어눌한 한국어로 입을 열었다.
그는 “지금 LA는 밤이니까 아기를 재우느라 전화를 못 받는 것 같다”며 “아까 훈련소로 떠나기 전에 잠깐 통화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K.Y는 LA에서 추방됐다. 추방 절차를 통해 홀로 한국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것은 2025년 4월이었다.
한국 국적자이지만 한국과 접점은 없다. 두 살 때 가족을 따라 LA로 건너간 뒤 단 한 번도 한국 땅을 밟아본 적도 없다. 한국어를 거의 알아듣지도, 말하지도 못한다. 겉모습만 한국인일 뿐 언어와 행동, 사고방식은 미국인에 가깝다.
K.Y는 자신이 왜 불법체류자가 됐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렇게 20여 년을 캘리포니아에서 살았다.
그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이유를 설명해줬지만 한국어로 말해줘서 잘 이해하지 못했고, 너무 어려서 ‘체류 신분’이란 의미가 무엇인지도 몰랐다”며 “그동안 스스로를 미국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미국은 나를 ‘미국인’으로 보지 않았던 것”이라고 말했다.
K.Y가 받아든 입영통지서.
K.Y의 얼굴과 온몸은 문신으로 뒤덮여 있다. 훈련소 입대를 앞둔 또래 청년들과는 외형부터 확연히 달랐다. 대부분의 대화를 영어로 이어가다 간간이 더듬거리며 한국어를 섞는 모습은 그가 아직 한국 사회에 동화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한국 정부는 개인적 배경을 감안해주지 않는다. 법이 정한 입영 규정에 따라 입영 통지서를 발송했다. 법적으로는 한국 국적자이기 때문이다.
군에 입대하면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대로 먹을 수 없다. 군에서 제공되는 식사를 따라야 한다. 가장 그리울 것 같은 음식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K.Y에게 ‘소울 푸드’는 한국 음식이 아니다.
그는 “가장 먹고 싶은 건 LA의 킹 타코”라며 “한인타운의 윌셔 불러바드와 웨스턴 애비뉴도 다시 보고 싶을 정도로 내가 살던 곳의 모든 게 그립다”고 말했다.
추방되기 전 K.Y는 LA한인타운에서 용접공으로 일했다.
K.Y는 어린 시절의 몇 차례 실수로 범죄 전력이 있다.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과거보다 미래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와 아들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다.
그는 “잘 살아보고 싶어서 용접공이 되려고 라이선스도 땄고, 그림도 많이 그렸다”며 “떳떳한 아버지이자 남편이 되기 위해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고 말했다.
입영 훈련소로 향하는 차 안에서 K.Y는 휴대전화에 저장해 둔 자신의 그림 사진을 여러 장 보여줬다. 연필로 정교하게 그린 인물 초상화와 꽃 그림들은 그의 재능을 짐작하게 했다. 그는 미술학교에 다닌 적도, 정식으로 레슨을 받은 적도 없다고 했다. 모두 혼자서 그린 그림들이었다.
K.Y가 이민세관단속국(ICE)에 체포된 것은 지난 2024년 6월의 일이다. LA 한인타운의 한 공장에 용접공으로 막 취직해 새 출발을 결심했던 시기였다. 출근을 위해 차에 타려던 순간 ICE 요원들이 그를 가로막고 무작정 수갑을 채웠다.
그는 “왜 갑자기 표적이 됐는지 전혀 모르겠다”며 “이유를 물어봤지만 아무 설명도 없이 체포됐다”고 말했다.
K.Y는 곧바로 콜로라도의 ICE 구금시설로 이송됐다. LA에 남아 있던 아버지와 조부모 등 가족과 분리된 채 불법체류자라는 이유로 홀로 수감됐다. 당시 임신 중이던 여자친구와 그는 구치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석방이 이뤄지지 않자 여자친구가 직접 구치소로 찾아와 간소한 결혼식을 치렀다고 했다.
그는 “가족도, 태어날 아이도 모두 LA에 있기 때문에 풀어달라고 계속 애원했다”며 “돌아온 대답은 ‘변호사와 이야기하라’는 말뿐이었다”고 회상했다.
변호사를 통해 석방을 시도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결혼 당시 여자친구는 시민권자였다.
K.Y는 “아내를 통해 I-130(가족 이민 청원서)을 제출했었다”며 “구금 상태였기 때문에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영주권 이 승인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구금된 지 300일이 넘던 어느 날, K.Y는 영문도 모른 채 ICE 요원들에게 이끌려 갑자기 비행기에 올랐다. 목적지는 한국 인천이었다. 강제 추방 절차였다.
그는 “한국에는 아는 사람도, 친척도 없는데다 언어까지 안 통하는데 공항에 내리면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며 “노숙자가 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까지 들었다”고 말했다.
K.Y가 갓 태어난 아들을 안고 있다. 그의 머리에는 조부모의 이름이 문신으로 새겨져 있다.
주머니 속에는 LA에서 알던 한 한인 목사가 적어준 전화번호 쪽지 한 장뿐이었다.
K.Y는 그때를 회상하면서 “버려진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인천 공항을 나서는데 막막함이 밀려왔다. 일면식도 없는 이들에게 손짓과 영어를 섞어 휴대전화를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연결된 곳이 추방자를 돕는 기독교 단체 ‘세계십자가선교회’였다. 그는 이 단체를 담당하는 안일권 목사의 도움으로서울의 한 셸터에서 머물 수 있게 됐다.
K.Y는 한국에서도 또 다른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다.
그는 “문신도 많고 한국말도 아예 못하니까 사람들이 피하더라”며 “버스에서 빈자리가 있어도 아무도 앉지 않는 모습을 보며 너무 외로웠다”고 말했다.
수많은 훈련병들 속에서 그는 여전히 혼자다. 미국에서는 추방자, 한국에서는 이방인이다. 평생 지워질 수 없는 낙인을 안고 또 다른 사회에서 홀로 삶을 이어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