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제9차 당대회가 지난달 25일 끝났다. 당이 영도하는 국가인 북한에서 당대회는 최고 의사결정 기구다. 지난 5년을 평가하고, 차기 국가전략과 정책 방향을 결정한다. 최고 지도부를 선출하는 중요한 정치행사이며, 내부 결속과 동시에 외부로 메시지를 발신하는 전략적 기능도 수행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북한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총비서로 재추대했다. ‘우리식 사회주의’가 발전하고, ‘명실상부한 핵보유국’으로서 국제적 위상이 더욱 높아졌다고 선전했다.
2024년 북 GDP 1990년의 86%
미국의 제재 해제가 북이 살길
북·미 관계서 한국 역할 필수
한·미, 공동으로 설계·운용하길
경제 성과와 청사진 생략
그러나 경제에 대한 언급은 우울했다. 2021년 제8차 당대회 이후 경제 운용의 핵심은 ‘정비·보강’이었다. 제재와 코로나 위기 대응, 성장 기반 복구가 목표였다. 경제가 제대로 돌아갔다면 성과를 자랑하고 희망찬 청사진을 제시했어야 한다.
하지만 김정은은 지난달 20일 당대회 사업총화보고에서 지난 5년간 “물질 기술적 토대가 다져지고 주저앉았던 부문들이 정상궤도에 들어서기 시작했다”고 표현했을 뿐이다. 국방 분야의 자신 넘치는 평가와 차이가 크다. 전망도 신중하다. 김정은은 당대회 결론(지난달 23일)에서 앞으로 5년을 “안정 공고화, 점진적인 질적 발전” 단계로 규정했다. 지난 5년의 ‘정비·보강’ 구호와 별반 다르지 않다. 미래 역시 “지나온 변혁의 5년을 더 위대한 변혁의 5년으로 만들자”는 주문에 그쳤다. ‘새로운 도약’이 아닌 ‘기존의 연장’이다. 7차 당대회에서 “휘황한 설계도”를 내놓겠다던 2016년 신년사의 확신에 찬 전망과는 확연히 다르다.
실제로 북한 경제는 여전히 암울하다. 한국은행 추정에 의하면, 2024년 경제 규모(실질 국내총생산)는 냉전이 끝나던 1990년 대비 86%에 불과하다. 무역 규모도 그때의 65% 수준이다. 30년 넘도록 성장은커녕 오히려 후퇴했다. 총량도 문제지만, 지역 및 계층 간 격차는 더욱 심각하다. 과거엔 ‘혁명의 수도’ 평양의 변화에서 대리 만족을 느꼈지만, 이젠 그런 시대가 아니다. 내 동네도 곧 발전할 것이라는 기대는 진작 실망으로 바뀌었다. 시장 확산은 신흥 부유층의 등장이라는 새로운 격차를 낳았고, 핸드폰 보급은 정보를 실시간으로 전달하면서 상대적 박탈감마저 증폭시켰다. 평등했던 사회는 사라졌다. 2024년부터 매년 20개 시, 군에 10년간 지방공업공장을 건설해서 도농 격차를 줄이겠다는 ‘지방발전 20×10 정책’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2024년 1월 당중앙위 확대전원회의에서 김정은이 실토했듯, 지역 간 불균형은 경제적 문제를 넘어 “우리 당과 정부에 있어서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심각한 정치적 문제”가 됐다.
자칫 경제적 문제가 정권과 체제의 불안정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우려였다. 경제 문제는 민생의 영역에서 통치의 영역으로 이동했다. 그래서 격차 해소와 복리 증진을 “반드시 실행하여야 할 정치투쟁과업”이라고도 표현했다. 그만큼 경제가 어렵다는 반증이었다.
인식은 맞았지만, 수단이 없었다. 공장을 지을 자본이 부족했다. 완공해도 전력과 원자재 공급이 문제였다. 있던 공장을 헐어 새 공장을 짓는 격이었다. 기존 공장의 가동률은 자연히 낮아졌다. 자본이 충분히 조달되지 않는 한, 정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미 그런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책임은 간부들에게 돌아간다. 지난 1월 19일 룡성기계연합기업소 개건 준공식에서 김정은은 간부들의 무능 탓에 혼란과 손실이 발생했다는 이유로 현장에서 부총리를 해임했다. 이번 당대회 결론에서도 새 공장들의 운영 부진을 “극도의 태만과 무책임성” 때문이라고 질책했다. 해법으로 “대중 자신이 주인답게 참가하도록 노동자들을 각성시키는 것이 절박한 과제”라며 ‘사상’만 누누이 강조했다.
정신무장만으로는 한계 ‘정신무장’만으로 경제가 성장할 리 없다. 하지만 내부자본 축적은 거의 없다. 러시아 특수는 한계가 있고, 중국과의 경협은 제재로 활발하지 않다. 남한과는 아예 불가능하다. 한국은 한때 북한 최대의 투자국이자 지원국이며 2위의 무역상대국이었지만, 이번 당대회에서의 고백처럼 “문화 유포”에 대한 불안으로 모든 대화와 협력을 끊었기 때문이다.
결국 대미 관계 개선을 통한 제재 완화밖에 없다. 그래야만 자본 유입의 공간이 열린다. 경제 회생뿐만 아니라 정치 안정을 위해서도 절실하다. 김정은도 모를 리 없다. 그래서, 미국에 유화적 손짓을 했다. 베네수엘라, 이란에 대한 미국의 강경책도 은근히 압박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미국과 좋게 지내지 못할 리(이)유가 없다”는 김정은의 이번 발언은 지난해 9월 최고인민회의에서 “미국과 마주 서지 못할 리유가 없다”는 수사에서 한 걸음 더 진전된 신호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 동안 북한의 대미 접근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향후 5년은 북한에 정치적으로 중요한 시기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제10차 당대회가 열릴 2031년은 김정은 집권 20년이 되는 해다. 김정은으로서는 2012년 집권 첫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겠다”는 약속을 최소한의 수준에서나마 지켜야 한다. 그래야 후계 구도도 공식화할 수 있다.
이제 우리의 대북 정책과 대미 정책은 수레의 양 바퀴처럼 같이 굴러가야 한다. 북·미 협상 과정에서 우리의 전략적 이해가 반영되도록 해야 한다. 북·미 관계가 개선된들 트럼프의 미국이 직접 자본을 투입할 리 없고, 십중팔구 한국을 내세울 것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북한에 경수로를 지어주는 대신 핵을 포기하기로 한 1994년 제네바 합의 때도 그랬다. 합의는 미국이 했지만, 공사비의 대부분은 한국이 부담했다.
미국의 선의를 기대할 일이 아니다. 철저히 한·미 국익의 정합성을 구축해야 한다. 북·미 관계 개선을 위해서는 한국의 역할이 필수적임을 미국이 나서서 북한에 설득하고 요구하도록 해야 한다. ‘피스 메이커’, ‘페이스 메이커’로 나눌 것이 아니라 한·미가 평화의 질서를 공동으로 설계하고 함께 운용하는 ‘피스 메이트’(peace mates)가 돼야 한다. 현재의 남북관계에서 ‘바늘구멍’보다 한·미 관계의 탄탄한 ‘터널’ 확보가 우선이며, 그것이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 주장을 현실적으로 무력화하고 남북관계를 정상화하는 가장 확실한 방안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