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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혜의 마음 읽기] 인공지능과 편집자의 일

중앙일보

2026.03.03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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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혜 글항아리 대표
편집자가 되고 몇 년 후인 2010년께 어떤 흐름이 등장했다. 몇몇 큰 출판사가 편집자에게 기획만 시키고 편집은 맡기지 않은 것이다. 편집자의 일은 기획과 편집인데 대부분의 시간은 편집에 쓰게 된다. 그 이유는 기획서라는 게 어떤 양식에 맞춰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트렌드 조사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 섭외는 중요하지만 실력의 관건은 상당 부분 편집에 달려 있다.

가성비 따져 편집 경시하는 문화
AI가 교정·교열 대신하며 가속화
그래도 인간의 편집, 살아남을 것

즉 단어와 문장의 뉘앙스를 정성스레 손본 흔적, 틈새를 메우는 능력, 지적 체계를 돕는 재배치 솜씨, 거친 부분을 마모하는 기술, 과함을 경계하는 판단력은 다음 작가를 찾는 데 밑바탕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폄하와 훼손은 늘 자기 안에서 먼저 조급하게 일어난다. 편집을 값싼 일로 깎아내리는 문화가 출판계 내부에서 생겨났고, 책의 품질 저하는 별일 아닌 듯 여겨졌다. 다수의 편집자는 자신이 한 번도 장인이라고 느껴볼 새 없이 책을 만들어왔다.

최근 인공지능(AI)의 등장으로 글쓰기와 번역에 대한 폄훼가 이뤄지기 전에도, 그걸 다루는 편집자는 역할 전환을 재촉당하면서 자기 일에 의심을 품도록 만드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편집자는 마케터 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시간을 SNS와 카드뉴스 작업에 쓰다 보니 원서 대조는 헐거워지고, 오문과 오타는 무방하다고 여겨졌다. ‘가성비’라는 단어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기보다 유행처럼 번졌다. 이전 시대의 편집자가 바늘처럼 예민했다면 오늘날엔 무딘 칼이 되라고 요구받는다. 실용서가 대세이니 인문학 서적 기획을 고집하지 말라는 말이 흘러나오자 인문서 편집자 지망생들은 목적과 수단이 도치된 상황에서 ‘좋고 훌륭한 것(善)’에 대한 감각을 얻을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러다 근래엔 독자와의 만남이 중요해지면서 편집자의 역할이 큐레이션 쪽으로 확대됐다. 며칠 전 나는 현시대에 편집자의 역할이 어떻게 바뀌어야 할지 AI에 물었다. 답은 ‘교정·교열과 보도자료는 자기한테 맡기고 큐레이션에 집중하라’였다. 사실 자신의 지성과 감정을 동원해 텍스트 세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편집자는 존재 가치를 거의 느낄 수 없고,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은 부서질 것이다.

일의 의미가 폄하되고 축소된 세월은 짧지 않다. 일을 가능한 한 적게 하고 외주를 주는 것은 더 품위 있는 일에 집중할 시간을 버는 것처럼 여겨져왔다. 하지만 과정 없이는 삶도 없으며, 경력과 자존감 역시 생기지 않는다. AI가 내놓은 결과물에 대한 조정자 역할에 머물거나 수용적 사고를 하게 되면, 특히 글에 관해 그렇다면 우리는 직접 ‘살아본’ 적 없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AI의 등장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직접 하지 않으면 제 것이 되지 않는다’는 말은 주관적인 만족감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는 일상의 감각 및 지식의 체화와 직결된다. 편집자가 문장을 다듬는 과정은 텍스트와 벌이는 치열한 상호작용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저자의 사유 방식을 흡수하고, 시대의 언어를 감각하며, 안목을 얻는다. 사유의 도구인 문장을 직접 다루지 않는 편집자는 자기교정과 자기비판 능력을 갖출 수 없다. 따라서 ‘기획력’이란 수만 개의 문장을 만지고 다듬으며 쌓은 언어의 퇴적물 위에서 피어나는 꽃임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즉 지금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업무의 비효율이 아니라 직접 경험의 증발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감각보다 AI의 정확도가 높아진 시점에도 수만 시간 동안 갈고닦는 이런 노력이 시장 가치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출판 시장의 어느 분야에서는 수작업에 대한 고집이 불필요한 비용으로 취급받을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분야에서는 ‘직접 다듬은 흔적’이 품질을 담보해줄 것이다. 게다가 상당수 독자는 그 안목이 개입된 서사를 읽길 원할 것이다. 일찍이 리처드 세넷이 “사람은 자신이 만드는 물건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해 배울 수 있다”고 주장했듯이, 나는 오히려 혼란한 좌표 속에서 책이라는 물건을 더 제대로 만들기 위해 더 많이, 더 정확히 읽는 데 집중할 것이다. 늘 그래왔듯 외부의 폄하에 직면하면서도 그것을 지켜내려는 내면의 노력을 끝까지 붙들면서.

이은혜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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