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퇴임한 노태악 대법관 후임 인선이 늦어지고 있다. 대법관 제청권이 있는 조희대 대법원장은 3일 출근길에 “(청와대와) 계속 협의를 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양측의 물밑 조율은 불발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가 원하는 대법관 후보는 더불어민주당의 재판소원법(헌법재판소법 개정안) 강행으로 되레 어려운 입지에 처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대법관 후보 추천위원회가 지난 1월 21일 추린 4명의 후보자 중 청와대는 “이재명 대통령 첫 대법관은 여성으로 하자”는 명분으로 김민기 서울고법 고법판사(55·사법연수원 26기)를 제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법원은 대법관의 저연차화 등을 우려해 1순위 박순영 서울고법 고법판사(60·25기), 2순위 윤성식 서울고법 부장판사(58·24기)로 역제안했다. 법원에서는 “원하는 대로 여성으로 1순위를 제안했는데도, 청와대가 협의에 제대로 임하지 않는다. 불통이다”라는 비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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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판결 남편이 뒤집는 모양새
이런 가운데 한 고법판사는 “여당이 강행한 재판소원법 통과로 김 고법판사를 제청하는 게 더욱 어려워졌다"고 전망했다. 김 고법판사의 남편은 오영준 헌법재판소 재판관으로 아내 판결을 남편이 뒤집을 수 있는 기이한 모양새가 됐기 때문이다. 법원 내부에선 추후에 설사 오 재판관이 해당 재판 회피신청을 할 수 있더라도 이런 구조 자체를 판사들이 받아들일 수 있겠냐는 반발이 나온다.
김 고법판사가 진보성향 법관모임인 우리법연구회 출신인 점도 대법원 제청 대상에서 제외한 것 아니냐는 얘기도 있다. 고법판사 출신 변호사는 “김 고법판사가 임명되면 이재명 정부의 첫 대법관 임명이란 점에서는 진보적 인사이고 대법관 기수가 내려간다는 점에서 선명성이 살겠지만 남편이 헌재 재판관인 점 등 공격받을 소지도 있다”고 말했다.
남은 후보자는 박 고법판사와 윤 부장판사인데 대법원과 청와대 조율이 잘 안 되고 있다고 한다. 두 명 중 1명으로 낙점하더라도 복잡한 계산식을 풀어야 한다. 박 고법판사는 2021년 3월 김명수 전 대법원장 지명으로 중앙선관위원이 됐다. 박 고법판사가 대법관이 되면, 선관위원에 대법관이 2명이 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 대법원이 노태악 선관위원장 후임으로 천대엽 대법관을 선관위원에 내정했기 때문이다. 관례에 따르면 선관위원장은 대법관 출신이 맡아왔다.
선관위법 등에 정해진 것은 없지만 대법관과 선관위원 병행시 업무 과중 등을 고려했을 때 박 고법판사가 선관위원에서 물러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게 법원 내부 의견이다. 선관위원장은 대법원 사건 배당이 제외되는데 선관위원은 그렇지 않고, 선관위원을 대법관이 한 전례도 없다. 수도권의 한 부장판사는 “정해진 선관위원 임기(6년)가 있기 때문에 대법관과 선관위원직을 같이 할 수 있을지 실질적인 걸 봐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경우 조 대법원장이 선관위원을 새로 지명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윤 부장판사는 현재 속해있는 서울고법 형사1부가 내란전담재판부를 맡게 된 점이 변수다. 4일 윤석열 전 대통령의 체포방해 사건 항소심 첫 재판을 앞두고 있다. 한 고법판사는 “윤 부장판사를 대법관에 추천해 해당 재판부에 새롭게 사람을 보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인사가 마무리된 시점이기 때문에 이젠 제비뽑기가 아니라 콕 집어 보낼 수밖에 없다”며 “또다른 시비가 붙을 수 있다”고 말했다.
대법관의 경우 조 대법원장이 마음먹으면 제청권을 행사할 수 있으나 국회 승인을 거치려면 일차적으로 대통령 승인이라는 난관이 존재한다. 이 대통령이 임명동의안을 국회에 송부해야 인사청문회 등 이후 절차가 진행될 수 있다. 국회에서 인사청문보고서 채택이 한 차례 불발되거나(권영준) 자진사퇴한(김병화) 적은 있었어도 제청된 후보자가 국회에서 최종 낙마한 사례가 없었던 배경이다.
법원 내부에서는 이 대통령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파기환송심 주심을 맡았던 박영재 대법관을 법원행정처장에 임명한 것부터 대법관 후보자 조율 불발, 조희대 사법부의 2인자로 일컬어졌던 천대엽 대법관의 선관위원 내정까지 대법원과 청와대가 사사건건 부딪치고 있다는 우려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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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없이 폄훼·법관 악마화 바람직하지 않아”
조 대법원장은 이날 출근길에 기자들과 만나 민주당이 사법개혁을 명분으로 지난 26~28일 법왜곡죄, 재판소원법, 대법관증원법을 통과시킨 점을 저격했다. 조 대법원장은 “이번 갑작스런 대변혁이 과연 국민들에게 도움이 되는지, 혹시 해가 되는 내용은 없는지 마지막까지 한번 더 심사숙고해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조 대법원장은 ‘사법 불신’ 때문에 제도를 개편해야 한다는 민주당 주장에 대해 “갤럽 조사에서 법원에 대한 신뢰도가 미국은 35% 수준인 반면 우리나라는 47%”라며 “너무 우리 제도를 근거 없이 폄훼하거나 법관들의 개별 재판을 두고 악마화해서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을 심사숙고해달라”고 했다.
대법원과 청와대 간 협의가 난항을 겪으면서 노태악 대법관은 이날 후임 인선 없이 6년의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다. 노 대법관은 이날 퇴임사에서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고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사안을 사법부로 가져오는 현상이 더욱 심화하고 있다는 게 저만의 생각일까”라고 반문했다. 이어 “누군가는 ‘정치의 사법화는 지금처럼 양극화된 사회에서 결국은 사법 불신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고 우려했다. 노 대법관 퇴임으로 대법관 4인으로 이뤄진 대법원 1부는 당분간 3인 체제로 운영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