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이란 간 군사 충돌 여파로 원·달러 환율이 야간 거래에서 한때 심리적 마지노선인 1500원을 넘어섰다. 환율 급등에 따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예정됐던 해외 출장을 연기하고 긴급 대응에 나서는 등 외환시장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4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 거래일 종가보다 12.9원 오른 1479.0원에 개장하며 전날 야간거래 급등 흐름을 이어갔다. 앞서 서울외국환중개에 따르면 달러-원 환율은 3일 야간거래(오후 3시30분~다음날 오전 2시)에서 장중 1506.5원까지 상승했다. 환율이 장중 1500원 선을 넘은 것은 2009년 3월 이후 약 17년 만이다. 1500원대 환율은 외환위기(1997~1998년)와 글로벌 금융위기(2008~2009년) 등 대형 금융 충격 시기에 나타났던 수준이다.
이번 환율 급등은 미국과 이란의 충돌에 따른 에너지 공급 불안이 작용한 결과로 분석된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 이후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봉쇄에 나서면서 글로벌 원유 수송 차질 우려가 커졌다. 호르무즈 해협은 전 세계 원유 물동량의 약 20%가 통과하는 핵심 해상 통로다.
실제 인접 산유국의 생산 차질 우려도 커지고 있다. 이라크 매체 샤팍뉴스에 따르면 세계 두 번째 규모 유전인 루마일라 유전에서는 원유 생산과 송유가 전면 중단됐다. 루마일라는 하루 약 150만 배럴 이상의 원유를 생산하는 대형 유전으로, 공급 차질이 현실화될 경우 국제 유가 상승 압력이 더욱 커질 수 있다. 이라크 당국은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유조선 운항이 중단될 경우 하루 300만 배럴 이상 원유 생산을 줄여야 할 가능성도 제기했다.
공급 불안은 곧바로 국제유가 상승으로 이어졌다. 뉴욕상품거래소에서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선물 가격은 장중 한때 9% 이상 급등하며 배럴당 74달러 수준까지 올랐다. 글로벌 외환시장에서는 안전자산 선호 심리가 강화되며 달러 강세 흐름이 나타났다. 달러인덱스(DXY)는 장중 99.65까지 상승했다. 전날 98 후반대에서 추가 상승한 것이다.
유가 급등은 단기 인플레이션 우려를 자극하며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금리 인하 기대도 약화했다. 금리 인하 기대가 후퇴하자 달러 강세가 심화했고, 이는 원화 약세 압력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원유 공급 차질이 현실화될 경우 글로벌 경제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JP모건은 하루 100만 배럴 규모의 원유 공급 감소가 지속할 경우 글로벌 국내총생산(GDP)이 분기 기준 약 0.3%포인트 낮아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에너지 가격 상승이 장기화할 경우 인플레이션 압력이 확대되고 글로벌 성장률에도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의미다. 박상현 iM증권 연구원은 “한국 등 일부 아시아 국가와 독일 등 유럽 국가 금융시장이 이란 사태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며 “유가와 천연가스 가격 급등이 금융시장 변동성을 키우고 있다”고 말했다.
단기적으로는 환율이 1480원대에서 등락할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민경원 우리은행 이코노미스트는 “글로벌 리스크 오프(위험회피) 분위기와 달러 강세 영향으로 환율 상승 압력이 우위를 보이며 1480원대 초반을 중심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한은도 대응에 나섰다. 이창용 총재는 당초 스위스 바젤에서 열리는 국제결제은행(BIS) 총재 회의와 국제통화기금(IMF) 관련 일정 등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할 예정이었지만 최근 외환시장 변동성이 확대되자 일정을 연기했다. 이 총재는 4일 오전 ‘중동상황 점검 TF 회의’를 주재하고, 환율 급등 배경과 주요국 환율 변동 상황을 점검했다.
한은은 “현재는 과거 위기 시기와 달리 달러 유동성이 풍부하고 한국의 대외차입 가산금리와 CDS 프리미엄(국가부도위험 지표)도 안정적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며 “다만 중동 상황 전개에 따라 금융시장 변동성이 커질 가능성이 있는 만큼 환율과 금리가 국내 펀더멘털과 괴리돼 과도하게 움직이지 않는지 면밀히 점검하고 필요시 정부와 협조해 대응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