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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놈 똘똘하네" 베테랑 선장도 깜짝…바다 접수한 항해사 정체

중앙일보

2026.03.03 19:00 2026.03.03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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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 HMM 에메랄드호 선장이 조타실에서 항해 장비 모니터를 설명하고 있다. 부산=고석현 기자
" 대양을 가르는 긴 항해 길에 ‘똘똘한 항해사’ 한 명을 더 얻은 것 같아요. "
지난달 26일 부산신항 4부두에서 만난 박상현(47) HMM ‘에메랄드호’ 선장은 인공지능(AI) 선박 자율운항 솔루션 ‘하이나스(HiNAS)’를 이렇게 평가했다. 승선 경력 23년, 선장 경력 9년의 베테랑 박 선장도 인정한 운항 실력이다.

1만3000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개)급 대형 컨테이너선인 에메랄드호는 2024년 11월 HMM 선박 중 처음으로 자율운항 솔루션을 적용해 시험운항 중이다. 이 솔루션은 HD현대그룹의 자율운항 선박기업 아비커스가 개발했는데, 총 10만해리(17만6600㎞)거리를 왕복하며 항해를 도왔다. HMM는 올해말까지 40척에 하이나스를 도입할 계획이다.

부산~미국 로스앤젤레스(LA)를 8주 주기로 왕복(미주 서안 노선)하는 에메랄드호는 간밤 부산항에 들어왔다. 길이 335m, 폭 51m, 높이 66m에 달하는 선체는 10층 아파트와 맞먹는다. 집채만 한 크레인이 배 위의 화물을 쉴 새 없이 나르고 있었다. 이 배에는 한국인 항해사·기관사와 필리핀 선원 등 총 23명이 승선해 있다.

김주원 기자
선체에 올라서자 바닷바람 사이로 묵직한 기름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이 배에서 가장 높은 ‘콤파스 데크’는 레이더스캐너 등 관측장비가 집중돼 있는 곳이다. 한편엔 AI 자율운항 솔루션의 핵심인 ‘하이나스 내비게이션 카메라유닛’이 설치돼 있었다. 폭 한 뼘 반(약 31~33㎝), 너비 한뼘(약 24㎝) 크기의 상자 모양이다.

김현재 아비커스 책임은 “광학카메라 3대, 적외선 카메라 3대 등 총 6대가 밤낮 가리지 않고 에메랄드호의 ‘눈’ 역할을 한다”며 “AI가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사전에 설정해둔 조건에 맞춰 선박이 자동으로 트랙과 선속 등을 유지하도록 한다”고 설명했다.

콤파스 데크에서 수집된 데이터는 케이블을 따라 실시간으로 브릿지(선교, 조타·해도·통신실 등이 위치한 공간)로 전송된다. 기존에는 종이지도를 펼쳐놓던 ‘해도실’의 큼지막한 모니터에서 현실의 바다와 디지털 해도가 만난다. 해도를 비롯해 실시간 전방 영상, 항로·속력·수심·타각, 주변 선박 정보 등 각종 정보가 한눈에 들어왔다.

지난달 26일 HMM의 컨네이너선 '에메랄드호'가 부산신항 4부두에 정박해있다. 1만3000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개)급 대형 컨테이너선으로, 부산~미국 로스앤젤레스(LA)를 8주 주기로 왕복(미주 서안 노선)한다. 부산=고석현 기자
전태영 HMM 에메랄드호 2항사가 하이나스의 '루트 플래닝' 기능을 활용해 부산항에서 미국 로스앤젤레스(LA)까지 가는 항로를 설계하고 있다. 부산=고석현 기자
전태영 에메랄드호 2항사는 “기존 선박에도 자동조타장치(오토파일럿)가 있었지만, 방위(헤딩)를 유지하는 데 그쳤다”며 “하이나스는 스스로 최적의 항로를 설정하고 이에 따라 자동으로 운항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항해사가 목적지별 도착 희망 시간을 입력하면, 시스템이 실시간 기상 정보와 항로를 고려해 최적의 엔진회전수(RPM)와 선속 가이던스를 자동으로 계산해준다”며 “다양한 항해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운항 효율을 높이고, 계획된 트랙을 정확히 유지하는 식으로 AI와 협동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하이나스는 다른 선박을 감지해 충돌을 피하는 피항(避航) 기능도 갖췄다. ‘타이태닉의 비극’을 원천적으로 차단할수 있는 셈이다. 김현재 책임은 “설정한 범위 안에 다른 선박 등이 들어올 경우 항해사에게 알리고, 불가피한 경우 시스템이 변침을 수행해 피해간 뒤 원래 항로로 복귀하는 기능도 갖췄다”고 말했다. 전 2항사는 “통항량이 많은 해역에서는 항해사가 수동으로 조작하지만, 대양처럼 선박이 적은 구간에서는 자동 회피가 유용하다”고 설명했다.

HD현대 아비커스 김현재 책임(앞줄), 안지원 매니저(뒷줄 왼쪽), 이상원 선임이 '하이나스' 시스템을 시연하고 있다. 부산=고석현 기자
에메랄드호의 최상부 ‘콤파스 데크’에 위치한 ‘하이나스 내비게이션 카메라유닛’은 인공지능(AI) 자율운항 솔루션의 '눈' 역할을 한다. 광학카메라 3대, 적외선 카메라 3대가 들어있다. 부산=고석현 기자
HMM 측은 하이나스 도입 이후 파일럿 테스트에서 연간 2.5~4.5%의 연료 절감과 탄소배출 감축 효과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통상 대형선 한 척의 연간 연료비가 100억~200억원 수준인데, 아비커스 측은 “연료 절감만으로도 하이나스 설치 비용을 1년 이내에 회수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선박의 완전 자율운항까진 아직 갈 길이 멀다. 바다의 규칙은 도로보다 더 까다롭기 때문이다. 김현재 책임은 “하이나스는 국제해사기구(IMO)의 자율운항선박(MASS) 기준 2단계 수준인데, 현재 대형 화물선에 적용해 AI를 학습시키며 데이터를 쌓아온 사례는 하이나스가 유일하다”며 “아직은 선원의 견시가 필수이고 피항 기능도 항해사의 판단으로 작동해야 한다. 특히 통항량이 많은 해역에선 수동 조작이 원칙이라 제한사항이 많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AI가 대양을 오가는 대형 상선의 운항에 실제로 참여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자율운항 기술이 조만간 현장에 확산될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박 선장은 “아직은 AI가 항해사의 당직을 대신 설 수준은 아니지만, 판단·감시에만 집중할 수 있어 업무부담이 줄고 선박 운항 안전성은 높아졌다”며 “향후 자율운항 기술이 노동력 감소에 따른 선원 부족 문제를 완화해 줄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고석현([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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