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으로 중동 전역의 긴장감이 높아지는 가운데, 국내 산업계가 직면할 최대 변수는 ‘유가’보다 ‘현지 수주 지연’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중동 지역에 진출한 한국 대기업들의 해외법인이 140개에 달하는 만큼, 발주 차질이나 프로젝트 연기가 현실화할 경우 산업 전반으로 충격이 확산될 수 있다는 우려다.
4일 한국CXO연구소에 따르면 공정거래위원회 지정 92개 대기업 집단 가운데 30개 그룹이 중동 10개국에 140개 해외법인을 운영 중이다. 전체 해외법인(6362개)의 2.2% 수준이지만, 에너지·플랜트·인프라 사업이 집중된 전략 지역이라는 점에서 체감 리스크는 적지 않다.
국가별로는 아랍에미리트(UAE) 56개, 사우디아라비아 38개로 두 국가에만 전체의 67%가 집중돼 있다. 이어 오만 12개, 이집트 11개 순이다. 그룹별로는 삼성 28개, 현대차·LG·GS 각 14개다.
문제는 중동 사업의 성격이다. 단순 판매법인보다 건설·플랜트·전력 인프라 등 대규모 프로젝트의 비중이 높다. 실제로 중동 진출 법인 가운데 건설업이 26개로 가장 많다. 사우디 ‘네옴시티’ 등 초대형 인프라 사업이 진행 중인데 지정학적 긴장 상황이 계속될 경우 발주 일정 조정이나 금융 조달 지연 가능성이 제기된다.
삼성은 중동에 28개 법인을 두고 있다. 사우디에서는 삼성물산이 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고, 이스라엘에는 반도체 연구 거점을 운영 중이다. UAE에는 전자제품 판매 법인이 다수 포진해 있다. 생산시설은 제한적이지만 프로젝트·연구·영업거점이 많아 지역 불안이 장기화할 경우 사업 속도 조절이 불가피할 수 있다.
현대차그룹의 경우 현대차가 사우디 킹 살만 자동차 산업단지에 연산 5만대 규모의 전기차·내연기관차 혼류 생산 공장을 건설 중이다. 최근 2년 새 중동 법인이 6개 늘어 총 14개로 늘어났다. 현지 생산거점을 축으로 중동 시장 공략을 강화하는 시점에 지정학 리스크가 불거진 셈이다.
전력·기계 업계도 긴장하고 있다. 중동은 국내 전력기기 업체들의 최대 해외 시장 중 하나다. 효성중공업·HD현대일렉트릭·LS일렉트릭 등은 사우디·UAE·쿠웨이트 등에서 송전망 확충과 발전 인프라 사업을 잇따라 수주해왔다. 대한전선과 LS전선 역시 초고압 케이블과 해저케이블 공급을 통해 중동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전력기기 업계 관계자는 “초고압 변압기나 발전 설비는 발주부터 제작·해상 운송·현지 설치까지 수년이 걸리는 장기 프로젝트가 일반적”이라며 “발주처의 의사결정이 늦어지면 공정이 밀리면서 매출 인식 시점도 함께 뒤로 이동할 수 있다”고 말했다.
LG와 GS 역시 중동에서 판매·건설·부동산 사업을 병행하고 있어 신규 프로젝트 발주 흐름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특히 GS는 오만에만 8개 법인을 두고 플랜트·건설 사업을 수행 중이며, LG는 중동 지역에서 판매법인과 일부 인프라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중동 긴장이 장기화해 2026년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 수준으로 오를 경우 한국 경제 성장률이 0.3%포인트 하락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본부장은 “유가 상승은 비용 부담이라는 단기 충격이지만, 중동 인프라 발주 지연은 건설·플랜트·전력기기처럼 수주 산업 전반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