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 우산에 무임승차 말라”며 동맹에 부담 분담을 압박해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동맹 경시 기조가 이란 전쟁 국면에서 주요 유럽 동맹의 기지 제공 거부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평소엔 각자도생을 요구하다 유사 시엔 동맹의 영토를 빌리겠다고 나서는 트럼프의 이중잣대는 향후 대만 유사시 등의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직면할 딜레마를 예고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트럼프는 지난 3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와 만난 자리에서 대이란 공습 과정에서 미군의 군 기지 사용을 불허·지연한 핵심 동맹국들을 향해 불만을 터뜨렸다. 기지 사용을 불허한 스페인에 대해선 “스콧(베센트 재무장관)에게 스페인과의 모든 무역 거래를 끊으라고 지시했다”며 경제 보복을 시사했다. 또 인도양 차고스 공군기지 사용을 지연시킨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를 겨냥해선 “어리석은 섬 문제로 관계를 망친다”, “윈스턴 처칠이 아니다” 등의 비난을 늘어놨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적국인 독일 앞에서 함께 연합군을 이끌었던 처칠과 스타머를 대비한 건 80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동맹 자체에 대한 불신을 나타낸 말로도 풀이됐다.
사실 집단적 자위권을 근간으로 하는 나토 국가들이 일원의 군사 작전에 비협조적인 태도로 맞선 건 매우 이례적인 장면이다. 두 나라가 겉으로 내세운 명분은 국익과 국제법 위반이다. 영국은 특히 이라크전 참전의 선례가 있기 때문에 국내정치적 상황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면엔 미국의 방위 책임 전가에 대한 반발이 깔렸단 말이 나온다. 실제 엘브리지 콜비 미 국방부 정책담당 차관은 지난달 12일 나토 국방장관회의에서 유럽이 자체 안보를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나토 3.0’을 강조한 바 있다. 당시 그는 나토의 버전을 ▶냉전 때 ▶냉전 후 ▶현재 등 3가지 시기로 나눈 뒤 “나토 1.0은 각자 책임을 다하는 강력하고 자립적인 국가들의 동맹이었다. 그러나 냉전 후 나토 2.0은 미국에 지나치게 의존하며 핵심 목적에서 벗어났다”며 “강대국 경쟁의 이 시기에 나토(3.0)는 새로운 현실에 적응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미국은 대중 견제에 집중할 테니 러시아발 위협은 유럽 국가들이 알아서 막으라는 뜻이었다. 그래놓고 이란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도움을 요청하자 동맹들도 냉담한 반응을 보인 것일 수 있다.
박인휘 이화여대 국제대학원장은 “미국이 옛날처럼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지 않겠다며 유럽에 안보 책임을 넘겨 놓고, 정작 베네수엘라에 이어 이란 등에 무력 개입을 강행하는 등 고립주의와는 정반대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유럽 동맹으로서는 고립주의와 개입주의 사이에서 미국이 어떤 기조로 가려는 것인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미국의 대이란 공격 과정에서 나토 동맹이 분열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트럼프는 인도·태평양 동맹에게도 자국 안보는 스스로 지키라고 요구해 왔다. 지난 1월 발표된 미 국방부의 ‘2026 국방전략서(NDS)’는 “한국은 미국의 중요하지만 보다 제한적인 지원”을 받으며 대북 억제에서 주된 책임을 질 수 있다고 명시했다.
동시에 미국은 효율적으로 중국을 압박하기 위해 전략적 유연성을 확대하려 하고 있다. 동맹에 자국 안보를 맡기면서 대중 견제에도 동참하게 하는 식이다. 이는 결국 주한미군의 역할과 규모 조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지난해 11월 방한 당시 기자회견에서 한·미 동맹 현대화 방향성에 대해 “한국이 한반도에서 재래식 방어를 주도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둘 것”이라며 “역내 유사시에 대한 유연성을 갖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밝혔다. 재래식 방어는 한국이 맡고, 주한미군은 중국 견제에 활용하는 걸 염두에 둔 발언으로 해석됐다.
당장 이란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연쇄적으로 한국에 주둔 중인 미군 병력과 자산이 재배치될 가능성도 있다. 댄 케인 미 합참의장은 지난 1일 기자회견에서 “쿠퍼 장군(대이란 공격을 이끌고 있는 브래드 쿠퍼 미 중부사령관)은 오늘도 추가 병력을 받을 것”이라며 지속적 병력 증파 방침을 확인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지난 2일 주한미군 자산이 이란 공격에 지원됐는지 여부에 대해 “주한미군의 전력운용에 대한 한·미 간 협의를 상세히 설명하긴 어렵다”며 “협의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대만 유사시를 상정하면 미국이 영국, 스페인에게 한 요구를 한국에도 할 가능성이 크다. 제주 해군기지 등 주요 기지 사용 등이다. 헤그세스 장관의 수석고문 출신인 댄 콜드웰은 이미 지난해 7월 싱크탱크 보고서에서 주한미군 감축 필요성을 강조하며 “한국이 한반도 외 역내 분쟁 시 미국의 기지 무제한 접근권(프리 액세스)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불만을 표했다. 다만 한국으로서 이는 미국에 대중 공격 기지를 제공하는 게 되는 셈이라 쉽게 결정할 수 없는 문제다.
이에 대해 김재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최근 나토 직제 개편을 보면 미국이 전체 통제권은 쥐되 전장에서의 구체적인 작전 임무는 동맹국에 대폭 넘기겠다는 의도가 명확하며, 이는 아시아 동맹들에도 이른 시일 안에 닥칠 수 있는 일”이라며 “대만 유사시 한국군이 어떤 역할을 할 지는 뜨거운 감자지만, 더 이상 논의를 미뤄두기 어렵다. 여론의 높은 지지를 받고 있는 현 정부가 나서 새로운 동맹의 기준과 역할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인휘 원장은 “유럽과 미국의 엇박자를 반면교사 삼아, 미국이 전개하는 동아시아 안보 질서 리셋 과정에 한국이 할 말을 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한다”고 평가했다. 대만 유사시를 가정해 우리의 구체적 기준선을 선제적으로 규정해 둬야 향후 안보 위기 국면 때 한·미동맹을 유리하게 작동시킬 수 있다는 취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