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은 기술로 바뀌지만 위기의 구조는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위기 때마다 ‘탄광 속 카나리아’ 같은 비유가 되살아난다.
종합주가지수(코스피)는 1989년 처음으로 1000포인트를 돌파했다. 3년 뒤 경기 둔화로 500포인트가 무너졌다. 1994년 초 저점 대비 97%를 회복했지만 1000포인트 탈환에는 실패했다.
미국의 긴축이 발목을 잡았다. 연방준비제도(연준)는 기준금리를 3.25%에서 1995년 초 6%까지 끌어올렸다. 장기국채 금리도 5% 초반에서 8% 부근으로 급등했다. 이른바 ‘채권 대학살’이 시장을 강타했다.
1994년 말 금리 인상 마무리가 가시화하자 국제 투자 자금이 위험자산으로 이동했다. 신흥시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코스피도 1100포인트를 넘어섰다.
아시아 시장 중에는 태국 단기채 시장이 특히 인기를 끌었다. 부동산 개발 붐을 타고 태국 경제는 견조해 보였고 달러당 25바트로 고정된 환율도 태국 채권 투자의 매력을 높였다. 선진국 은행에서 달러를 빌려 바트로 환전한 뒤 태국 채권에 투자하는 캐리 트레이드가 급증했다. 채권을 담보로 한 대출 구조상 가격이 일정 수준 아래로 떨어지면 마진콜(담보 부족 시 추가 증거금 요구)이 발생했다.
1996년까지는 마진콜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였다. 양호한 경제성장과 해외에서 유입되는 풍부한 유동성이 채권가격을 떠받쳤다. 하지만 이듬해 미국 인플레이션이 3%를 넘어서자 연준은 기준금리를 다시 올리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과도한 투자로 인한 경상수지 적자 누적 우려까지 겹치자 국제자금은 썰물처럼 신흥시장을 이탈했다. 각국 중앙은행은 자국 통화 가치를 지키려고 달러화를 팔아야 했고 보유 외환은 고갈되었다. 통화위기가 악화하자 바트화 채권 가격은 순식간에 75% 폭락했다.
달러를 빌려 태국 채권에 투자한 기관들은 현금 마련을 위해 헐값에 채권을 팔아 치워야 했다. 그 영향으로 채권 가격은 추가로 폭락했다. 다른 자산 가격이 연쇄적으로 무너지며 전면적인 금융위기로 번졌다.
최근에는 은행과 기관투자가, 고액 자산가에게 돈을 빌려 소프트웨어 관련 기업에 대출해 온 사모 여신 업체들이 유동성 위기에 직면했다. AI 기술의 급격한 발전이 소프트웨어 기업의 수익성을 잠식할 것이라는 우려로 투자금의 환매 요청이 빗발쳤다. 대형 사모 여신 회사 블루아울 캐피털도 자산을 팔아 환매 요구에 응해야 했다. 회사 주가는 올해 들어 25% 하락했다.
AI 인프라를 둘러싼 과열이 짙어지는 상황에서, 사모 여신이 ‘탄광 속 카나리아’가 될지 모른다. 마진콜은 늘 가장 약한 고리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