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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의 문화참견] 영화 ‘왕사남’의 따듯하고 슬픈 카타르시스

중앙일보

2026.03.04 07:16 2026.03.04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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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 문화칼럼니스트
객석 곳곳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눈물이 났다. 아니 속으로는 훨씬 전부터 울고 있었다. 퀭한 얼굴의 단종 박지훈이 등장한 첫 순간부터다. 이미 소년 왕의 운명은 알고 보기 시작한 영화였다. 절망과 분노, 체념과 기품이 뒤섞인 그의 눈빛을 보는 순간, 사실상 게임은 끝났다. 관객은 무장해제됐다. 영화 도입부 특유의 오버스러운 코미디, 다소 둔탁한 연출, 예전 같으면 한껏 논란이 됐을 생경한 호랑이 CG 같은 건 별 문제가 안 됐다.

늦게 시동 걸려 천만 관객 눈앞
박지훈 눈빛만으로 무장해제
다크 장르 범람하는 OTT 시대
감동과 눈물의 공백 파고들어

유배간 단종의 마지막 4개월을 그린 ‘왕과 사는 남자’. 단종 역의 박지훈(왼쪽)과 그의 최후를 지킨 엄흥도 역의 유해진이 보여주는 연기 케미가 영화의 감동을 더한다. [사진 쇼박스]
영화 ‘왕과 사는 남자(왕사남)’가 900만을 넘겨 1000만 고지로 달려가고 있다. 이번 주말이면 무리 없이 1000만 명을 돌파하리란 관측이 많다. 예측대로라면 장기 불황 속 2024년 ‘파묘’와 ‘범죄도시4’에 이어 2년 만에 나오는 1000만 영화가 되게 된다. 단종이라는 익히 알려진 소재에, 메가 히트와는 거리 먼 장항준 감독의 작품 스타일 등으로 이같은 초대박을 쉽게 예상치 못했다. 설연휴 기간 함께 걸린 류승완 감독의 첩보액션 ‘휴민트’(3일 현재 182만 명)의 손을 들어주는 쪽이 훨씬 많았다. 액션 영화의 출중한 기량으로 정평 난 류승완 감독은 2015년 ‘베테랑’으로 이미 1000만을 찍은 바 있다.

‘왕사남’은 개봉 첫 주부터 터지는 여타 1000만 영화와 달리, 200만 돌파까지의 기간이 길었다. 입소문을 타고 천천히 시동이 걸렸다는 얘기다. 제작비 110~120억으로 손익분기점 260만도 일찌감치 넘어섰다. 분노한 관객들이 세조의 묘지인 광릉의 지도 앱에 별점 테러를 하고, 단종의 유배지인 강원도 영월 청령포가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등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심, 지역경제 활성화까지 이루어지고 있다. 장 감독으로선 2023년 전작인 농구영화 ‘리바운드’(70만 명)의 흥행 참패를 설욕하고도 남았다.

# 울고 싶은데 울려준 영화
‘왕사남’은 강원도 영월로 유배 간 단종의 마지막 4개월을 그린 팩션 사극이다.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른 실존 인물 엄흥도(유해진)에 대한 짧은 기록에 상상력을 더했다. 실패한 권력, 약자들에 대한 응원·지지가 흥행 동력으로 분석되지만, 그보다는 어린 왕과 그의 마지막을 지켜주는 마을 사람들의 교감이라는 데 초점을 맞춰 전혀 새로운 이야기로 창조해낸 것이 주효했다. 정 깊고 순박한 사람들, 공동체의 우애와 연민, 코끝 찡한 슬픔과 감동 같은 단어들이 어울리는 영화인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요즘 이런 작품이 워낙 없었다.

OTT 시대 큰 특징은 다크 장르의 범람이다. 강한 자극에 폭력 수위가 날로 높아진다. 부패한 권력 등 사회적 거악에서부터 사이코패스·소시오패스 등 악인에 이르기까지 특히 공들여 묘사하는 것이 악이다. 워낙 악독해진 세상의 반영이겠지만, 누가 더 최악의 악을 전시하는가 경쟁하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정의구현도 악을 악보다 더 악하게 응징하는 방식이다.

‘왕사남’의 흥행은 이런 OTT 시대에 대한 피로감, 반작용처럼 보인다. 요즘 콘텐트에서는 잘 찾을 수 없는, 그래서 오히려 그리웠던 따뜻한 정서를 담아내 여러 세대 대중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영화적으로 올드하다는 비판도 꾸준하지만, 대중이 원한 건 세련된 만듦새가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는 인간애의 확인, 따듯한 슬픔이 주는 카타르시스였다.

얼마 전 로맨스 영화로는 이례적으로 선전한 구교환·문가영 주연 ‘만약에 우리’도 비슷했다. 헤어진 연인이 10년 만에 짧게 재회하는 이 영화 역시 트렌디하거나 특별한 만듦새는 아니었다. 불안한 미래, 가난에 발목 잡히는 평범하고 현실적인 연애 이야기라 공감을 샀다. 특히 구교환의 아버지(신정근)가 세상을 떠나며 친딸처럼 아꼈던 고아 문가영에게 남긴 편지가 나오는 장면에서 객석 반응이 남달랐다. 훌쩍이는 관객들이 많았다. 이 장면을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꼽는 젊은 관객들도 많았다.

어쩌면 사람들은 울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쥐어짜는 강요된 눈물말고 인간애와 선의의 힘을 확인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눈물 말이다. 안 그래도 악독한 세상, 악독한 콘텐트의 범람에 지친 이들을 달래주는 숨구멍 같은 영화가 ‘왕사남’ 아닐까 한다.

# 존재만으로 영화 납득시킨 박지훈
‘왕사남’은 배우들의 열연도 화제였다. 단종과 브로맨스를 펼친 소시민 촌장 엄흥도 역의 유해진, 팽팽한 긴장감을 더한 한명회 역의 유지태가 압도적인 연기를 했다. 그러나 역시 최고의 수훈갑은 박지훈. 전국민의 ‘단종 앓이’를 이끌어낸 그가 없었다면 아예 성립이 안 되는 영화다. 연민을 자아내는 미소년의 얼굴에 귀족적 풍모까지 더해, 그저 등장하는 것만으로 영화를 납득시켰다. 아이돌 출신 박지훈은 2022년 웨이브의 학원액션 시리즈 ‘약한 영웅’의 연시은 역으로 폭발적 연기력을 인정받은 바 있다. ‘약한 영웅’은 현재 넷플릭스 톱3에 오르며 역주행 중이다.

오래전 인터뷰 때 박찬욱 감독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워낙 배우에 대한 존중과 애정이 큰 감독이다. “영화에서 결국 관객이 보고 좋아하는 것은 배우다.” 영상과 서사, 연출이 있지만 그걸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은 결국 배우의 연기란 얘기다. 당시 할리우드 진출 전이던 박 감독은 “할리우드에 가고 싶은 이유도, 좋아하는 대배우들과 함께 작품을 하고 싶어서”라고 말했었다. ‘왕사남’도 좋은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를 보는 즐거움으로 내내 뿌듯했다.

양성희 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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