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자 1919년 3·1 만세 운동을 전후해 독립운동에 뛰어든 임시정부 지도자들은 과거에서 탈피한 새로운 국가를 꿈꿨다. 그들은 봉건왕조 체제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고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헌법에 해당하는 임시헌장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고 선언했다. 초기 임정의 이런 정신은 해방 이후 1948년 8월 15일에 출범한 대한민국의 헌법 1조 1항('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에 그대로 반영됐다.
현행 헌법엔 '민주공화국' 명시
국회에선 다수의 일방통행 난무
민주화 이끈 세력이 집권했는데
아직도 정치를 '집권투쟁'처럼 해
민주주의 결함, 공화주의로 교정
공화주의 강화할 문화운동 필요
민주공화국은 말 그대로 국민이 나라의 주인인 민주주의, 그리고 공공선·법치·자유 등이 존중되는 공화주의라는 두 축으로 굴러가야 온전해지는 정치체제다. 1987년 민주화가 실현됐고, 평화적 정권교체가 몇 차례 성사되면서 민주주의가 만개했다는 국내외의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위헌적 '사법 3법'을 일방통행식으로 강행한 거대 여당의 입법 독주에서 확인된 것처럼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지금 중대한 시험대에 올랐다. 게다가 민주주의의 쌍두마차인 공화주의는 한국사회에서 소홀히 취급당하고 있다.
다수의 입법 독주, 의회 민주주의 퇴보 국회에서 거대 의석을 보유한 민주당은 위헌 논란이 해소되지 않았는데도 법왜곡죄, 재판소원, 대법관증원 법안 등 사법 3법을 임시국회에서 일사천리로 강행 처리했다. 위헌 우려가 제기된 법 조항을 충분한 숙의로 해소하자는 사법부와 시민사회 등 각계의 요구는 묵살됐다. 군부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쟁취한 민주화 운동 세력이 주류인 민주당이 이래도 되나 싶다.
정치평론학회장을 역임한 이동수 경희대 명예교수는 "다수결은 민주적 의사 결정 방식이지만, 다수결이 민주주의 그 자체는 아니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소수 의견을 무시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빠지기 쉬운 중우(衆愚)정치다. 다수의 횡포로 소수 의견을 무시한다면 헌법의 공화주의 정신에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거대 여당은 법안 통과에 필요한 의결정족수를 규정한 국회법 조항을 준수했다고 주장하겠지만, 프랑스 철학자 몽테스키외가 강조한 '법의 정신'에는 위배된다는 것이다. 진보 성향 학자들이 주도해온 민주주의법학연구회에서 초대 회장을 역임한 강경선 방송통신대 명예교수는 "민주화가 실현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1980년대 학생운동 출신 정치인들은 정치가 아닌 집권투쟁을 하고 있다. 이제는 균형과 질서가 잡힌 성숙한 민주주의로 가야 한다"고 촉구했다.
헌법의 공화주의 정신 짓밟는 정치 헌법 1조 1항에 담긴 공화주의(共和主義)는 '함께 화합해서 다스리는' 정치 철학이다. 정치학자들은 공공선(公共善) 또는 공동선(共同善), 법치주의, 비지배 자유, 시민의 덕성 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로마 공화정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에이브러햄 링컨의 미국 공화주의로 진화했다.
지난해 말 공화협회 주최 토론회에서 김동규 21세기공화주의클럽 정책위원장을 만났다. 그는 단순히 투표로 대표를 뽑는 민주주의를 넘어 구성원들이 공공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법치(Rule of law)를 존중하며,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정치사상이 공화주의라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민주주의가 다수파의 지배를 중시하다 보면 소수파가 소외될 가능성이 있는데 공화주의는 소수파까지 포용해 모든 국민을 하나로 엮는 정치적 지혜를 모색해왔다. 김 위원장은 "이런 관점에서 보면 거대 여당의 사법 3법 강행은 공화주의 정신을 무시한 다수의 폭거"라고 비판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공화주의와 공화국 정신에서 많이 벗어나 보인다. 국회에서 벌어지는 광경에서 확인한 것처럼 자의든 타의든 정치적 의사결정에서 소외되고 배제된 국민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채진원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 연구원은 "민주공화국은 민주와 공화라는 두 바퀴로 굴러가는 체제인데, 한국사회가 그동안 민주에만 집중한 나머지 공화 가치에 소홀했다. 다수파의 지배를 중시하는 민주주의가 견제와 균형, 법치주의를 통해 공동선을 추구하는 공화주의를 가리면서 정당은 대화·숙의의 장이 아니라 팬덤의 전쟁터로 변질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개딸'과 '윤 어게인'으로 불리는 극단적 두 진영의 팬덤은 서로를 민주주의의 적이라 비난하지만, 양쪽 모두 민주공화국을 위협하는 ‘반(反)공화주의의 쌍생아’라고 비판했다.
다수결 민주주의 과잉, 공화주의 결핍 사람의 몸은 특정 영양소의 과잉·과소 현상이 생기면 면역력이 무너지고 질병이 생길 수 있다. 공동체나 국가도 마찬가지다. 지금 한국 정치의 건강 상태를 진단한다면 민주주의라는 영양분은 과잉일 듯하다. 다수가 소수를 억누르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행태가 다반사다. 반면 공화주의는 영양 결핍이 심각하다. 나와 네가 서로를 죽이거나 배척해야 할 적이 아니라 함께 공존해야 할 동반자로 인식하는 공화주의 정신이 거의 실종됐다. 공동체가 분열과 갈등으로 해체 직전이다.
상황이 심각한데도 한국사회는 공화주의 학습이 미흡하다. 초·중·고 교실은 물론이고 대학에서도 법학자들은 판례 분석에 집중할 뿐 공화주의 교육은 뒷전이다. 서울 광화문에 건립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가 보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구절은 내걸었지만, 전시관은 온통 국민의 저항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한 기록들로 가득하다. 공화주의가 무엇인지, 나보다 우리를 생각하고 배려하는 공존의 공화국 정신을 어떻게 살려갈 것인지 고민한 흔적은 찾기 어렵다.
김주성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은 "민중이 늘 깨어 있고 지혜롭게 판단하면 좋겠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고 다수결을 앞세운 민주주의는 인치(人治)와 독재의 위험이 항상 있다. 공화주의를 통해 민주주의의 결함을 상당 부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한면희 전 성균관대 초빙교수(21세기공화주의클럽 상임대표)는 "공화주의의 모범 사례였던 미국조차 트럼프 정부 들어 공화주의 정신이 약해진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판이니 한국은 오죽하겠나. 대안으로 공화주의 토양을 강화하고 문화 운동을 추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미국, 삼권분립으로 다수의 횡포와 포퓰리즘 견제"
"결함 있는 민주주의를 맹목적으로 신성시하지 말아야" [인터뷰] 주대환 민주화운동동지회 회장
주대환(71) 민주화운동동지회 회장은 서울대 종교학과 입학 이후 민청학련 사건과 무림 사건, 부마 항쟁과 한국노동당 사건으로 네 차례 체포·투옥됐던 민주화 운동의 생생한 증언자다. 북한을 추종하는 주사파를 비판했고, 오랜 세월 진보정당 운동을 해온 비판적 지식인이다. 광화문에서 만난 그는 "본질에서 결함이 있는 민주주의를 소크라테스가 목숨 걸고 반대했다. 민주주의를 맹목적으로 신성시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Q : -2026년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현주소는.
A : "민주화 운동 시절에 우리는 민주주의를 멀리서 그리워하는 연인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만 그렸다. 민주화 이후에 민주주의를 경험하면서 비로소 우리는 민주주의의 실제 모습을 입체적으로 인식하게 됐다. 선동정치·중우정치·금권정치라는 비판이 고대 아테네에서 이미 나왔다는 사실도 새삼 깨달았다."
Q : -다수결과 선출권력이 절대선인가.
A : "데모크라시(Democracy)는 민주정(民主政)으로 번역해야 하는 정치체제의 일종이다. 아테네는 민주정으로 흥했지만, 민주정으로 망했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절제와 타협으로 군주정·귀족정·민주정을 혼합하고, ‘법의 지배’를 중시해 오랫동안 번영한 로마공화국을 세웠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로마를 참고해 삼권분립을 엄격하게 정립하고 견제와 균형으로 다수의 횡포와 포퓰리즘의 위험성을 경계했다."
Q : -입법 권력이 삼권분립을 흔드는데.
A : "헌법 1조에서 민주공화국이라고 국가 정체성을 규정하고 있지만, 법치주의와 삼권분립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몰랐다. 최근 입법부의 다수당이 행정부를 장악하고 사법부까지 흔드는 실정을 보면서 ‘민주’ 못지않게 ‘공화’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공화국 틀 안에서 민주정이 작동해야 한다는 것이 선조들이 세운 민주공화국의 헌법 정신이다."
Q : -공화정을 보장할 장치는.
A : "미국이 연방대법원 판사 임기를 종신제로 정한 이유는 사법부의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다. 미국처럼 한국도 비례대표 의원을 상원으로 만들어 양원제로 운영하는 방안을 추진하면 어떨까. 그리고 제도와 법률도 필요하지만, 시민적 덕성과 공동선 등 공화주의의 정신적·문화적 자산도 뒷받침돼야 하는데 많이 부족하다. 산업화와 민주화로 지금 누리는 자유와 풍요를 후손에게 온전히 물려주려면 우리 스스로 더 성숙한 시민이 돼야 한다. 절제하고 타협하고, 공존하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