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지조 대신 현실 택했으나 밀고자는 아니었다

중앙일보

2026.03.05 07:10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글자 크기 조절
기사 공유
세조의 충신 신숙주와 그 가족들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단종 즉위년(1452) 8월 10일, 말을 탄 신숙주가 수양대군 집 앞을 지나게 되었다. 마침 손님이랑 서서 이야기를 나누던 수양이 신숙주를 불러 세웠다. “어이 신수찬! 어찌 과문불입(過門不入)인가?” 그리고 안으로 끌고 들어가 술을 대접하며 은근히 그 마음을 떠본다. “옛 친구를 잊었는가? 이야기하고 싶은 지 오래였다. 사람에는 죽지 않는다 해도 사직(社稷·나라)을 위해서는 죽을 수 있지 않은가?” 이에 신숙주는 “장부로 태어나 집안에서 편안하게 죽을 수야 있겠습니까”라고 한다. 36세의 신숙주와 동갑내기 세조의 이 숙명적인 만남은 실록에 기록되었다.

단종복위 모의 알고도 발설 안 해
변절자라기보다 노선 차이로 봐야

능력·감각 뛰어났던 최고의 관료
세조의 적극 구애에 차츰 마음 연 듯

아내에게 면박당했다는 것도 야사
성삼문 옥사 5개월 후 윤씨 별세

신숙주 영정.
신숙주의 뜻이 만만치 않음을 읽은 수양은 그를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적극적인 구애 작업에 들어간다. 어린 왕의 숙부로서 영의정의 자리를 꿰찬 수양대군은 조정의 인사는 물론 국가의 모든 논의를 주도해 간다. 자신의 ‘대권’ 행보에 장애가 될 자들을 하나씩 처단해 가는 방식이다. 외형은 의정부 대신들의 조정 회의지만 실제는 왕권을 뺏기 위한 포석인 셈이다. 여기서 신숙주는 수양대군의 혀가 되는데, “수양이 정부 당상(堂上)과 함께 빈청에 나아가 좌승지 신숙주를 시켜 아뢰기를…” 하는 방식으로 조정 회의가 진행된다. 이에 신숙주는 태생인 학술연구직에서 행정관료직으로 변신해간다.

수양대군은 자기 사람이거나 포섭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면 벼슬을 미끼로 삼는데, 어린 왕은 종친의 수장이자 영의정인 숙부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사헌부가 수양대군의 작명(爵名) 남발을 상소하기에 이르는데, 벼슬은 국가의 공기(公器)이자 인주(人主)의 권한이기에 사사롭게 함부로 쓸 수 없다는 것이다.(단종실록 1년 4월 22일) 당시 성삼문도 한 자급(벼슬아치의 위계)이 오른 벼슬을 받고는 “내리신 명령을 빨리 거두어서 공기를 귀중하게 여기시라”는 상소를 올린다. 하지만 신숙주는 수양대군의 수하에서 옴짝달싹 못 하는 처지로 흘러간다.

신숙주 영입, 수양의 최대 과제
본관이 고령인 신숙주는 집현전 부제학에 공조 참판을 지낸 신장(申檣)의 5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전라도 나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신장은 사람됨이 온후하고 공손하며 문장에 능하고 초서와 예서를 잘 썼다. 그런데 술을 너무 마셔 좋은 재주가 술에 묻힌다며 세종은 왕명으로 삼가도록 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52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동료 대신 허조는 “이런 어진 사람을 술이 해쳤다”며 탄식했다.(‘신장 졸기’) 다섯 아들의 이름에 술통을 뜻하는 ‘주(舟)’가 들어간 것은 애주가 아버지의 뜻이었다고 한다. 맹주(孟舟), 중주(仲舟), 숙주(叔舟), 송주(松舟), 말주(末舟)가 그들이다. 맹주를 제외한 다른 형제들은 신숙주를 따라 세조 편에 서게 되어 고위직을 걸머쥐었다.

신숙주가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와 집필한 『해동제국기』. 사행 경험을 바탕으로 외교 관례 등을 정리했다.
신숙주는 5세 때 한양으로 올라와 7세 때는 윤회(尹淮)를 스승으로 본격적인 학습에 돌입한다. 어린 나이에도 기량이 남달랐고 글 읽기를 좋아했으며 기억력이 탁월했다. 22세에 생원 진사시에, 23세에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세종이 아끼는 집현전 8학사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중국어·일본어·몽골어를 비롯한 각종 외국어에 능통했다. 또 “천하의 서책 가운데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할 만큼 풍부한 독서로 뛰어난 학식과 교양을 갖추었다. 27세 때는 일본 통신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8개월 남짓 머물다 귀국하며 일본에 대한 기록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남겼다. 여기서 그의 외교관으로서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다. 시문(詩文)과 외국어, 품격있는 교양과 국제적 감각까지 갖춘 신숙주를 참모로 영입하는 것은 권력욕에 불타는 수양대군의 최대 과제였다.

앞서 신숙주의 마음을 떠보았던 세조는 그 두 달 후 단종 즉위의 표문(表文)을 받들고 명나라 출장길에 오른다. 이때 신숙주는 서장관으로 대동함으로써 “만릿길을 동행한 벗”으로 회자되었다. 그들은 명나라에서 4개월을 머물다 귀국하는데, 이로부터 8개월여 후 수양대군은 김종서를 제거하는 계유정난을 일으킨다. 수양대군은 김종서 부자의 역모 기미가 감지되어 왕명을 기다릴 사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 일주일 후 단종은 ‘역도로부터 나라를 구한’ 수양대군에게 공신호(功臣號)와 식읍 1000호, 전 500결 등을 하사하였다.(단종 3년 10월 17일) 그리고 수양대군이 건넨 명단으로 정난공신을 반포하는데, 여기에는 수양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집현전 학사들도 포함되었다. 김종서 살해를 합리화하기 위한 포석으로 보인다.

사헌부가 이의를 제기했다. 1등 공신의 조건이 ‘기미에 밝아 먼저 제거한’ 것에 있다면 수양과 한명회 정도는 그럴 수 있지만 ‘사냥개에 불과한 것들은’ 기미를 알 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사헌부는 공신 칭호를 받은 자들을 조롱하는 방법으로 수양을 비판한다. “옛말에 사냥개를 놓아 짐승을 잡으라고 지시한 자는 공이 있는 사람이고, 쫓아가 잡은 자는 공이 있는 개라고 합디다.”(단종 1년 11월 18일) 자존심이 무척 상했는지 신숙주는 곧바로 한 일이 하나도 없는 자신을 공신 명단에서 빼 줄 것을 요청한다. 공신 작위를 받은 집현전 학사들도 줄줄이 철회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세조의 어진 초본. [사진 위키피디아]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신숙주는 ‘세조의 충신’이 되어 가는 듯하지만 세조는 언어와 태도의 절제력이 대단한 신숙주의 마음에 초조해진다. 도덕적 흠결 하나 남기지 않고 국정을 수행하는 신숙주가 세조에게는 사실 버거운 존재였다. 신숙주에 맞먹는 최측근으로 한명회·정인지·권람·홍윤성 등이 있지만 이들은 개인 재산을 불리고 지위를 탐하는 탐욕의 화신으로 사관은 물론 여론의 예봉을 피해 가지 못한 자들이었다. 무엇보다 신숙주는 단종이 세조에게 선위한 사실과 세조가 왕위를 접수한 사실을 적은 두 표문을 받들고 명나라의 승인을 받아 온 사람이다. 단종 즉위를 알리는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온 지 3년 만에 주문사(奏聞使)로 다시 방문한 것이다. 세조로 하여금 ‘왕위 찬탈’의 혐의를 벗고 조선의 합법적인 국왕으로 거듭나게 한 실무자가 곧 신숙주인 셈이다. 그런데 명나라에 머물던 3개월 만에 신숙주에게 부인 윤씨의 부음이 날아온다.

신숙주 아내 죽자 세조 음식 마다해
신숙주의 부인 윤씨는 본관이 무송으로 세종대의 대제학이자 자신을 가르친 스승 윤회의 손녀이다. 신숙주의 나이 40에 들며 8남 1녀를 낳은 부인 윤씨와 사별한 것이다. 윤씨의 부음에 세조는 매우 이례적인 반응을 보인다. 애도의 의미로 국왕이 철선(撤膳·음식을 들지 않음)을 하고 어찰을 내려 극진하게 상례를 치르게 한 것이다. 신숙주를 위로하는 글을 보내어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라, 경이 너그러워야 내 마음도 편안해진다”라고 하였다.(세조 2년 1월 23일) 대신의 부인 상사에 음식까지 마다하는 왕이 있었던가. 그만큼 세조는 신숙주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부인 윤씨는 ‘신숙주 설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여러 야담집에는 성삼문 옥사가 일어나던 날 밤에 남편이 평소처럼 귀가하자 윤씨는 “친구가 죽었는데 혼자만 살아서 돌아올 줄 생각도 못 했다”고 하여 신숙주를 더 부끄럽고 슬프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육신 옥사는 윤씨 부인이 죽은 지 5개월 후의 일이기에 사실관계가 맞지는 않는다. 이런 이야기들은 윤씨 부인의 평소 처신이 소재가 된 것 같다. ‘배신자 신숙주’를 꾸짖는 부인의 설화는 숙주나물과 함께 시대마다 재생되었다. 근대 식민지 시기에는 더 모욕적으로 소환되는데, 변절자가 득세하는 시대의 현실이 반영된 것이다. 한편 신숙주와 윤씨의 여덟 아들은 요절한 장남을 제외한 7명 모두 고관대작으로 살다 갔다. 한명회의 장녀와 혼인한 장남 신주는 일찍 세상을 떴지만 그 아들 신종호는 조부의 양육과 교육으로 성장하여 부제학과 대사헌을 지냈다. 또 다른 손자로 신용개, 신광한 등이 있고 증손자로 사대부 화가 신잠(申潛)이 있다.

1462년(세조 8) 영의정에 오르기까지 신숙주에 대한 세조의 총애는 극진했다. “신숙주는 나의 위징(魏徵)이요” “내가 신숙주의 어짊을 알아보고 뽑아 써서 이렇게 되었으니, 사람 알아보는 밝음이 있다 하겠다.” 당태종을 인의(仁義)의 정치로 이끈 명재상 위징을 신숙주에 비유한 것이다. 신숙주는 정치가이자 행정가, 군사 전문가이자 학자로, 최고 권력자의 참모로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조선시대 현실 정치에서 신숙주만큼 영향력을 끼친 신하도 드물 것이다. 그런데 왜 그는 나라에 공헌한 위대한 업적을 덮어버리고도 남을 역사적 조롱거리가 되었는가.

역사 반복된다면 어떤 선택을
경기도 의정부 구성마을에 있는 신숙주의 묘. [사진 이숙인]
신숙주는 친구 성삼문과 박팽년의 단종복위 모의를 미리 알았지만 전해지는 이야기와는 달리 어디에도 발설하지 않았다. 친구에 대한 마지막 예의로 보인다. 성삼문이 “신숙주는 내 친한 친구지만 죽어야만 한다”고 한 말을 보면 그는 원래 사육신과 노선을 달리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를 변절자로 부르는 것은 과도해 보인다. 다만 집현전의 옛 친구들은 사람됨의 가치를 선택함으로써 육신과 멸족의 형벌에 처해졌다. 반면에 신숙주는 그들과 다른 선택을 함으로써 가족을 온전하게 했고, 후손 가운데 더러는 시대의 인재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누구나 한번은 죽는 인생에 같은 역사가 반복된다면, 나는 어떤 길을 선택할 수 있을까.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