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충북 옥천군 청성면 산계1리. 나흘 전 옥천군 전역에 군민 1인당 월 15만원(지역화폐)의 농어촌 기본소득이 뿌려졌지만, 청성면 주민들 반응은 냉랭했다. 최모(73)씨는 “청성엔 돈을 쓸만한 가게가 없다”며 “농기계에 기름을 넣고 싶어도 주유소는 최대 5만원으로 묶어놔 난감하다”고 토로했다. 전모(64)씨는 “읍(邑)에 상점이 몰려있는데 면(面) 사람들은 읍에 가서 기본소득을 쓰지 말라고 한다”며 “돈을 줘놓고, 쓰지 못하게 하니 답답하다”고 했다.
이날 산계리 면사무소 인근을 둘러보니 이렇다 할 상권이 형성돼 있지 않았다. 생필품을 파는 곳은 영세 상인이 운영하는 소매점 3곳과 농협 하나로마트가 전부였다. 파는 품목은 라면·밀가루·조미료·계란·음료수·과자 등 대체로 비슷했다. 한 곳뿐인 식당은 임시 휴업상태였다. 주유소와 정육점이 없었다. 상점 주인 박모(87)씨는 “돈이 풀렸다고 구멍가게에 들러 물건을 살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며 “기본소득을 앞두고 카드 단말기를 놨지만, 여태껏 카드로 결제한 품목은 담배 세 보루와 계란 한 판이 전부”라고 말했다.
청성면 주민들은 기본소득 효과를 체감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정부가 면 지역 사정을 고려치 않고 사용처를 너무 제한했다”고 입을 모았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지난달 26~27일 옥천군을 포함한 전국 9개 군(郡) 지역(전남 곡성은 3월 말 시행)에서 기본소득 사업을 시행하면서 읍·면간 사용처에 차등을 뒀다. 옥천군을 포함한 8개 군에 속한 읍 지역 거주자는 읍·면 전역에서 사용할 수 있지만, 면 지역 거주자는 읍을 제외한 면 지역에서 소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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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에 가맹점 67%” 면↔면 지역 사용 설정 불만
다만 5개 업종(병원·약국·학원·안경점·영화관)은 거주지와 관계없이 사용할 수 있다. 주유소·편의점과 면 지역 농협 하나로마트에선 한 달 합산 5만원 한도 안에서 사용해야 한다. 군비를 보태 기본소득을 월 20만원으로 책정한 경북 영양군과 전남 신안군 역시 면 거주자가 기본소득 50%를 면 지역에서 사용하도록 제한했다.
문제는 시범지역의 지역화폐 가맹점이 읍 지역에 몰려있다는 점이다. 박현규 옥천군 기본소득팀장은 “1읍·8면인 옥천은 기본소득 사용처 2503곳 중 67%(1678곳)가 옥천읍에 집중돼 있다”며 “상당수 면 지역엔 식당이나 미용실, 옷가게 등 소비처가 많지 않아 당분간 불편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이날 옥천읍의 한 정육점에서 만난 70대 남성은 “고기를 사러 왔다가 면 주민 카드는 읍에서 안 된다는 말을 듣고 빈손으로 가게 됐다”며 “면에서 상권이 열악한 다른 면으로 돈을 쓰러 갈 시골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차별받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동이면 주민 서모(58)씨는 “퇴근길에 옥천읍에서 물건을 사고 싶은데 면에서만 쓰라 하니 불편이 이만저만 아니다”라며 “동이면에 정육점이 없어서 옆 동네인 이원면으로 고기를 사러 갔다”고 했다. 50대 김모씨는 “기본소득을 받아 고맙긴 하지만, 사용처 제한 때문에 조롱당하는 기분마저 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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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육점서 고기 못 산 70대 “면 사람 차별하나”
다른 지역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4개 읍과 5개 면이 있는 강원 정선군도 면 지역 거주민들이 불편을 호소하고 있다. 특히 실질적인 생활권이 정선읍인 화암면의 경우 상권을 코앞에 두고도 식당과 상점을 찾아 화암면행정복지센터까지 가야 한다. 행정복지센터 주변 상점의 규모도 작아 찾는 물건이 없다 보니 다시 읍내로 나가는 일도 많다고 한다.
전상걸(65) 정선군번영연합회장은 “면 단위 지역엔 작은 식당이나 마트조차도 없는 곳이 많아 불편이 크다”며 “마을 인근이 읍내인데 일부러 면 단위 상점을 찾아가야 하는 만큼 사용처를 유연하게 가져가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청양군 대치면 주민 이성우씨는 “대치면에는 하나로마트 외에는 사실상 기본소득 사용처가 없다”며 “돈을 나눠줬지만, 쓸데가 없어 난감하다”고 했다.
면 거주민의 기본소득 절반을 관내에서 쓰도록 한 영양군에서도 “면 주민의 사용처를 더 확대해 달라”는 민원이 많다고 한다. 김건형 영양군 기본소득팀장은 “청기면은 기본소득을 쓸 수 있는 곳이 농협 하나로마트·주유소·농자재 판매점 말고는 없다”며 “하나로마트 등에서 10만원을 쓰고, 나머지 10만원을 쓰기 위해 왕복 1시간 거리에 있는 입암면으로 가야 하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경남 남해군 관계자는 “1읍 9개 면인 남해는 가맹점 3500개 중 2200여 개(62%)가 읍에 있다”며 “일부 면 주민은 읍보다 먼 면 지역으로 소비하러 가야 하는 불편함을 호소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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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청양·신안 이동형 장터 운행
이 같은 문제가 제기되자 옥천·청양군 등은 화물차를 개조한 이동식 장터를 운영할 방침이다. 신안군은 관내 7~8개 읍·면 낙도를 대상으로 이동 마트·장터, 생필품·유류·농자재 배달, 도시락 서비스 등을 운영할 방침이다. 박양미 옥천군 공공급식팀장은 “안내·안남·청성·청산면 등 4개 면 지역에 이동 장터를 운영해 소비 진작을 유도하겠다”고 말했다.
농식품부는 이달 옥천군 등 시범지역과 함께 기본소득 사용처 개선 등을 논의할 예정이다. 이경미 농식품부 서기관은 “읍으로 소비가 쏠리는 현상을 막기 위해 읍·면, 생활권 별 사용처를 구분했다”며 “당장은 불편하겠지만, 기본소득이 지속하면 면 지역에도 없던 상점이 생기는 등 경제창출 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인정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이사는 “기본소득 정착을 위해서는 몇 개월 만이라도 면 거주민의 사용처 제한을 완화하는 게 좋을 것 같다”며 “면 지역에 상점을 만들 때 예산을 지원해주거나, 면에서 소비할 경우 인센티브를 주는 등 소비처를 늘리기 위한 방법도 병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농어촌 기본소득은 인구 소멸 지역 인구를 늘리고, 농어촌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도입됐다. 경기 연천, 강원 정선, 충북 옥천, 충남 청양, 전북 순창·장수, 전남 곡성·신안, 경북 영양, 경남 남해 등 전국 10개 군 지역이 시범 사업 대상지다. 이 지역에선 2년간 모든 주민에게 지역화폐 등으로 매월 15만~20만원이 지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