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전 대통령과 그 시대에 대한 담론은 대개 두 갈래였다. 한쪽은 경제 성장의 신화를 찬양하는 ‘근대화의 기수’로, 다른 한쪽은 민주주의를 짓밟은 ‘잔혹한 독재자’로 그를 그리곤 했다. 역사학자 황병주의 신간 『박정희 이데올로기』는 이 해묵은 이분법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이 책은 ‘박정희(1917~1979) 시대’를 관통하는 핵심 원리를 이데올로기의 관점으로 되돌아본다. 이데올로기는 일종의 ‘안경’ 같은 것. 박정희 정권이 단순히 총칼로 사람들을 위협해 독재를 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 어떤 안경을 씌워주어 정권의 뜻대로 움직이게 만들었는지를 돌아봤다는 얘기다.
저자는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의 ‘통치성(Governmentality)’ 개념을 빌려 논의의 지평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통치성이란 용어는 이 책의 열쇳말로, 박정희 시대를 해부하는 날카로운 메스로 사용된다. 그 의미는 국가가 위에서 아래로 명령을 내려 통제하는 ‘지배’와 달리, 대중이 국가가 지향하는 특정한 방식에 동의하며 스스로를 다스리게 만드는 ‘통치의 기술’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분석은 박정희 체제를 ‘군사적 통치성’과 ‘자유주의적 통치성’의 혼종으로 파악한 지점이다. 저자는 박정희 정권이 군대식 규율(군사적 통치성)로 사회를 옥죄면서도, 동시에 ‘잘 살아보세’라는 개인의 욕망과 경쟁(자유주의적 통치성)을 교묘하게 자극했다고 본다. 이질적으로 보이는 두 통치성의 결합을 박정희 체제의 특징으로 지목하며, 이를 ‘군사적 자유주의’(Miliberalism)라는 신조어로 명명했다.
예컨대 새마을 운동은 단지 국가가 모든 것을 해주는 시혜적 사업이 아니었다. 새마을 운동은 단순한 농촌 근대화가 아닌 통치 기술의 결정체로 해석된다. ‘자조(自助, self-help)’하는 마을을 돕는다는 조건부 지원을 통해 마을 간의 무한 경쟁을 유도했다. 저자가 볼 때, 농민들은 억압당하고 있다는 느낌 대신, 남보다 앞서가야 한다는 ‘자유주의적 경쟁심’에 불타 스스로를 근대적 인간으로 개조해 나갔다. 저자는 이런 방식으로 박정희 체제의 ‘성공’과 그 이데올로기의 ‘지속성’을 설명해낸다.
저자는 현재 한국인의 마음속에 작동하는 ‘국가주의적 무의식’의 연원도 추적한다. 효율을 위해 소수를 배제하거나, 끊임없이 경쟁에서 승리해야 생존할 수 있다는 ‘경쟁 지상주의’를 당연시하면서 국가의 성취(K컬처, 경제 지표 등)에 나의 행복을 지나치게 투사하고 있다면, 박정희가 설계한 통치성의 그물 안에 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저자의 주장은 국가 폭력의 공포를 과소평가하고, 대중의 심리와 욕망에 과도한 책임을 지운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대중이 박정희를 지지한 이유는 실제로 배고픔이 해결되고 생활이 개선되었기 때문이라는 경험적 반론을 받을 수도 있다.
한국이 산업화와 민주화의 이중 혁명에 성공한, 세계에서 드문 국가로 평가된다는 점을 저자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의 손가락은 다른 곳을 가리킨다. 바로 그 세계적 성공을 압축적으로 이뤄내는 과정에 체질화된 ‘근대화의 그늘’을 성찰해보자는 것이다. 박정희를 찬양하는 이들에게는 그 ‘성공의 대가‘가 무엇이었는지를, 그를 혐오하는 이들에게는 그가 만든 ‘성장 서사’에서 자유로운지를 묻고 있다.
저자는 박정희라는 이름을 한국 근대화의 상징적 기호로 호출했다. 이 책의 독서는 그를 향한 숭배나 비난이 아닌 ‘내 안의 박정희’를 되돌아보게 한다. 민주화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권위주의적 리더십에 매혹되는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고 싶은 독자라면, 근대사를 둘러싼 병리적 갈등 현상의 뿌리를 진단해 보고 싶은 독자라면, 저자가 그린 통치성의 지도를 한번쯤 따라가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