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전쟁 장기화 우려로 국제 유가가 치솟고 있다. 유가 상승은 가스·석탄 가격까지 끌어 올리며 전세계 ‘에너지발 인플레이션’ 우려를 키운다. 물가 상승세가 확산 조짐을 보이자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는 ‘물가 잡기’에 나섰다.
5일(현지시간) 주요 외신에 따르면 뉴욕상업거래소에서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선물 가격은 전장보다 8.51% 오른 배럴당 81.01달러로 마감했다. 2024년 7월 이후 약 1년 8개월 만의 최고 수준이다. 이란 사태가 본격화된 지난달 27일(67.02달러) 대비 20.9%가 올랐다. 두바이유 선물도 전장보다 10.11% 오른 89.31달러에, 브렌트유 선물도 4.93% 오른 배럴당 85.41달러를 기록했다.
유가 불안을 키운 건 이란이 페르시아만 북부에 정박 중이던 대형 유조선을 공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다. 오전 1시40분쯤 쿠웨이트 무바라크 알 카비르항에서 남동쪽 30해리(약 55㎞) 떨어진 곳에 정박 중이던 유조선 1척이 무인 수상 드론의 공격을 받았다. 이란이 봉쇄를 선언했던 호르무즈 해협에서 800㎞나 떨어진 곳이다.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넘어 페르시아만 전체로 공격 범위를 넓히면서 불안감이 확산된 것이다. 중국이 정제유 수출을 중단했다는 소식도 유가 상승을 부추겼다.
전 세계 원유와 액화천연가스(LNG) 수송의 약 20%를 담당하는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봉쇄되면서 역내 산유국들의 원유 생산에도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이스라엘 공습 이후 세계 5위 산유국인 이라크의 원유 생산량이 절반 이하로 감소했다”고 보도했다. JP모건은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지속할 경우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원유 공급이 며칠 내 중단될 수 있으며 분쟁 8일째에는 하루 최대 330만 배럴의 공급 차질이 발생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는 하루 세계 석유 공급의 약 3%에 해당한다.
골드만삭스의 사만다 다트 애널리스트는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원유량 감소가 향후 5주간 지속될 경우 브렌트유 가격이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설 수 있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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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 가격 연쇄 상승…인플레이션 자극
에너지 가격 상승은 원유에만 그치지 않는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유럽 가스 가격은 전쟁 이후 약 53% 급등했다. 가스 가격 상승으로 발전회사들이 가스 대신 석탄 사용을 늘리면서 석탄 수요도 증가하고 있다. 유럽 발전용 석탄 가격은 전쟁 직전 대비 26% 오른 톤당 133달러로 약 2년 만의 최고 수준이다.
에너지 가격 상승은 글로벌 인플레이션 압력을 다시 키우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블룸버그 이코노믹스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장기화할 경우 올해 말까지 미국 물가 상승률이 약 0.8%포인트 추가 상승해 3%를 넘어설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는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의 장기 물가 목표(2%)를 크게 웃돈다.
전미자동차협회에 따르면 이날 기준 미 전역 휘발유 평균 소매 가격은 갤런당 3.25달러로 전주 대비 9% 상승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있었던 2022년 3월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유가 상승은 백악관의 물가 관리 부담을 키우는 요인이다.
수지 와일스 미 백악관 비서실장은 참모들에게 휘발유 가격을 낮출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전략비축유 방출과 휘발유세 일시 유예 등이 거론된다. 블룸버그는 “세계 최대 산유국이자 소비국인 미국이 석유 시장에 개입하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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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 급등에 백악관 대응…한국 경제도 부담
물가 압력이 커지면서 Fed의 금리 인하 기대도 약해지고 있다. 시카고상품거래소 페드워치에 따르면 연방기금 선물시장은 6월까지 기준금리가 현 수준에서 동결될 확률을 64.4%로 반영했다. 일주일 전 48.6%에서 15.8%포인트 상승한 수치다. JP모건은 최근 보고서에서 올해 미국 금리 인하 전망을 기존 1회에서 0회로 낮추며, “사실상 금리 인하 사이클이 종료됐다”고 평가했다. 재닛 옐런 전 미국 재무장관은 “이란 사태로 Fed가 금리 인하를 더욱 주저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런 흐름은 한국 경제에도 부담 요인이다. 한국무역협회는 국제유가가 10% 상승하면 수출 단가는 2.09%, 수입 단가는 3.15% 올라 생산비 부담이 늘고 소비자물가 상승 압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전규민 하나증권 이코노미스트는 “유가 상승이 한국 교역조건을 악화시키고 경상수지 흑자 폭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유가 상승은 달러 수요를 늘리는 ‘페트로달러’ 효과를 통해 환율 상승(원화값 하락) 압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날 원·달러 환율은 전 거래일보다 8.3원 오른 1476.4원에 마감했다. 하나증권에 따르면 미국의 이란 공습 이후 주요 아시아 통화 가운데 원화 약세 폭이 가장 컸다. 같은 기간 원화는 약 1.8% 약세를 보이며 위안화(-0.4%), 인도 루피(-0.7%), 엔화(-0.7%)보다 낙폭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