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잊을 수 없는 고백이다. 1980년대 국민만화 ‘공포의 외인구단’ 주인공 ‘까치’의 명대사. 다소 오글거리지만, 그 시절 수많은 ‘엄지’들을 어떤 환상 속에 가뒀다. 그런데 만화가
이현세가 ‘마지막 수작업 웹툰’이라며 속편 불가 원칙을 깨고 35년 만에 부활시킨 여성은 영원한 여신 엄지가 아니라 19금 성인물 ‘블루엔젤’(1991)의 하지란이다. 딱 ‘여자 마동석’이라 할 스태미나 여형사다. 70대가 된 하지란이 악당들에게 공격당하고 깨어나 보니 20대로 회춘, 악의 무리들을 잔인하게 응징하는 이야기. 카카오웹툰에서 최근 연재를 시작한 ‘블루엔젤 리부트’다.
‘마지막 수작업’ 선언에 ‘첫 속편’이라는 수식까지, 기왕 대표작을 부활시켜야 하는 것 아닐까 궁금해 개포동 화실로
이현세를 찾아갔다.
이현세가 누군가. 1978년 ‘저 강은 알고 있다’로 데뷔한 이래 무려 4400여 작품을 쏟아내며 아동 중심이던 국내 만화시장을 성인 중심으로 이끈 거목이다. 최근 골수형성이상증후군(MDS) 진단을 받아 다소 수척했지만, 여전히 놀이처럼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야생의 까치’를 닮은 눈빛은 하지란의 회춘, 아니 영생을 꿈꾸고 있었다.
Q : 왜 엄지가 아닌 하지란인가요.
A : “여성 히어로니까요. 젊을 땐 남자 몸의 동선에 심취했는데, 나이 들어서 그런가 여자 몸을 그리고 싶더라고(웃음). 하지란은 줄담배를 피우며 악당을 때려잡는, 당시에도 파격적인 캐릭터였죠. 여성 독자들은 엄지에 불만이었어요. 주인공을 도와주는 소극적 역할이니까요. 더 강해지고 싶고, 남자와 사회에 의존하지 않는 현대 여성의 내재된 욕망을 투영한 게 하지란이죠. 이번엔 성형의 힘으로 사각턱에서 뾰족턱으로 만들어 버렸죠.”
Q : ‘회춘’ 코드는 작가님의 로망일까요.
A : “내 로망도 있죠. 원래 젊음은 젊은 사람에게 주기 힘들어요. 청춘을 낭비하잖아요. 반면 노인은 젊음 외에는 관심이 없죠. 그런데 얻고 나면 과연 행복할까요. 손에 쥐었다가 스멀스멀 빠져나가는 걸 지켜보는 게 가장 힘든 법이거든요. 내면은 70대인데 외모만 20대인 ‘청고인(청년 고령인)’을 통해 지독한 괴리감을 그려보고 싶었죠.”
Q : 저라면 ‘19금’보다 대중을 선택할 텐데.
A : “범죄를 묘사할 때 표현의 자유를 위해서예요. 보통 범죄물이 피해여성의 성을 팔지만, 나는 범죄자 응징에 진심이거든요. 나쁜 놈들은 더 고통스럽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응징해야죠. 하지란도 거의 악마에 가까워요. 그리고 이건 저와 함께 늙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만화죠. 요즘 웹툰은 작가도 독자도 1020이 주도하는 로판(로맨스 판타지) 일색이라 되게 서럽거든요. 젊음을 잃어가는 5060도 만화를 보고 싶은 욕구는 있으니까요.”
사실 ‘블루엔젤 리부트’를 ‘AI
이현세’의 작업으로 오해했었다.
이현세가 AI 프로젝트에 적극적이라 알려졌고, 예전 작품을 모티브 삼은 데다 그림체도 좀 낯설어서다. “난 원래 미모사 같았어요. 신념에 집착하는 게 아니라 환경에 적응해왔죠. 하지란도 요즘 스타일로 그림체를 바꾼거에요. 내 그림이 자주 달라지니 옛날부터 화실 제자가 그린 게 더
이현세 같다고 했는데. 지금도 오해들 할 겁니다. 화실에 평생 수작업을 같이 해온 팀이 두 명 있어서, 연필과 펜 작업을 우리가 하고 채색과 보정은 기획사에서 합니다. 가능한 마지막까지 수작업을 하고 싶은데, 내가 제일 문제죠. 연필 들 힘이 있어야 되니까.”
Q : 만화가 원래 중노동이죠.
A : “그래서 당분간 요양을 가요. 머리를 쓰면 백혈구를 만들 영양분을 뇌가 다 가져간다고 해서 ‘멍때리기’만 해야 하죠. 그래도 회복이 안되면 골수검사부터 해야 하니 사실 절체절명이에요.”
돈·출세…‘외인구단’은 드라마 같은 만화
밝은 표정으로 “절체절명”이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이 아이러니했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신작을 그리다니. “전부터 조금씩 준비한 프로젝트예요. 몇 년 전 일본의 한 서점에서 모치즈키 미키야의 ‘와일드7 리턴즈’를 만났는데, 내가 좋아했던 작가가 내가 좋아했던 ‘와일드7’을 70대에 되살려 낸 것이 정말 멋지더군요. 블루엔젤을 그 나이에 다시 시작하다니 멋있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 나도 시작했죠.”
Q : 저는 ‘외인구단’을 다시 보고 싶은데요.
A : “사람들이 그런 스포츠만화를 본적 없었을 거예요. 당시 출범한 프로야구가 너무 좋은 소재였죠. 아마추어 스포츠맨십을 넘어 프로스포츠를 통해 돈, 출세, 승부욕, 사랑 같은 온갖 드라마를 펼칠 수 있었으니까요. 돈에 팔려온 마지막 구단인 삼미 슈퍼스타즈는 외인부대 그 자체였죠. 경상도 사람이 인천을 위해 뛰다니, 돈을 위해 뭐든지 하고 자기한테 설움 준 사람을 응징하기 위해 돌아온 어벤저스를 당시 독자들은 상상도 못했죠.”
Q : 돌아보면 ‘이장호의 외인구단’(1986)이 만화 원작 흥행영화의 원조였어요.
A : “이장호 감독은 만화를 보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가수 전영록이 강력 추천했다며 전화가 왔어요. 캐스팅도 참 잘됐죠. 최재성은 날렵한 게 딱 까치더군요. 이보희도 엄지 역에 정말 어울렸는데 ‘어우동’ ‘무릎과 무릎 사이’가 너무 히트하는 바람에 선입견이 있었고. 안성기씨도 손병호 감독 역이 자기 스타일이 아닌데도 기꺼이 나와 줬어요. CG가 없을 때라 조상구의 너클볼을 표현 못한 건 지금도 아쉽죠. 정교한 애니메이션이 필요했는데, 제작비가 턱없이 부족했거든요.”
Q : 4400개가 넘는 작품 수가 인상적입니다.
A : “절반은 프로덕션이 만들었으니 기억 못하는 작품도 있어요. 인기가 있으니 상품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는 욕심도 있었지만, 많은 소재를 다루려고 더 적극적으로 활용했어요. 만화는 언제나 신선해야 된다고 생각해서, 새로운 과학이나 사회현상을 프로덕션이 가장 빨리 반영하게 했어요. 사람들이 호기심을 갖고
이현세 만화를 즐긴 이유죠. 하나의 세계관이라면, 지구는 언젠가 멸망하지만 인간에게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니 존재의 이유가 있다 정도로 정리가 되요. 매일 눈뜨고 뉴스 보면 인간이 다 죽는 길로 가고 있는 게 보이지만, 그래도 꽃을 심는 거죠.”
그 많은 이야기 보따리가 어디서 나왔냐고 물으니 “공상을 많이 하는 아이였다”고 답한다. ‘빨갱이 연좌제’에 얽힌 복잡한 가족사, 색약 탓에 미대를 못 가고 순정만화가 화실에서 그림을 배운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만, 방대한 이야기의 원천은 늘 궁금했었다. “경주라는 천년고도에서 자라서 그런가. 첨성대에 기어 올라가고 김유신 장군 묘가 놀이터였거든요. 지금은 유적지로 담을 막아놨지만 그땐 황톳길 가운데 있었어요. 방학이면 도서관 어린이교실에서 향토사학자들이 옛날 이야기로 ‘썰’을 풀어주니, 꿈을 많이 꾸는 소년이 탄생한 거죠. 그래서 가난해도 행복했어요. ‘달동네 왕자’로 살았다고 할 수 있죠.”
Q : 아픈 손가락도 있죠.
A : “‘천국의 신화’죠. 젊은 시절 열정으로 덤빈 프로젝트거든요. 아프리카 피그미족까지 천지창조 신화가 정립돼 있는데, 우린 건국신화만 있으니 환인과 환웅 이전이 필요하다고 봤어요. 외설 시비로 중단했다가 20년이 지나 뒷이야기를 웹툰으로 이어가려니 잘 안 됐어요. 신화의 와일드한 화면이나 상상력이 웹툰의 세로 연출로는 구현이 어려웠죠.”
건강 악화됐지만 ‘수작업’ 고집 꺾지 않아
결국 출판만화가 사라진 탓인데, 사실 웹툰과 AI 등 디지털 전환에 앞장선 게 그다. 그는 웹툰이 K컬처의 원천 콘텐트가 된 지금 세상을 예견이 아니라 ‘원했다’고 표현했다. “20년 전부터 이런 세상이 와야 한다고 주장했죠. 웹툰이 나오니 많은 작가들은 대자본의 노예가 된다고 반대했지만, 나는 설사 노예가 된다 해도 한국만화가 좀 세계로 나가서 만화선진국들 같은 콘텐트 시장이 만들어지는 걸 원했어요. 그런데 하루아침에 출판만화가 없어질 줄은 몰랐죠. 다른 나라는 공존하잖아요. 최근 일본 애니메이션의 원작 만화들이 역주행하면서 출판만화 시장이 다시 시작됐는데, 어쨌든 고무적입니다. 웹툰은 영화처럼 시간 연속 예술이지만 만화란 공간 연속 예술이라 또 다른 세계거든요. 결국 그 혜택을 우리 작가들도 보게 되겠죠.”
Q : 독자들 호흡이 갈수록 짧아지는데요.
A : “요즘은 전철에서 웹툰도 아니고 쇼츠를 보던데, 오히려 그게 우리 시장의 힘이라고 봐요. 변화에 적응 잘하고 유행에 벌떼처럼 달려드니 콘텐트 생산에도 힘이 실리죠. 이 척박한 영화시장에서 희한한(
?) 영화가 천만 가는 걸 보세요.”
그는 ‘AI
이현세’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기획사 재담미디어가 그의 작품 ‘카론의 새벽’을 재해석한 리메이크를 만들고 있을 뿐, 개인 작업과는 별개라는 것이다. “가끔 오해하는데, 나는 오로지 수작업만 해요. AI를 적극 수용해야 한다고 한 건 인간이 전기나 자동차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거부할 수 없다는 뜻이죠. AI는 아카이브 구축에 쓰고 있어요.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려면 내 만화를 다 학습해서 특정 작품 스타일로 표현해야 하는데 금방 되는 일은 아니죠. 하지만 100년 뒤에도 내 아바타가 미래 인류와 내 세계관으로 소통하길 원합니다. 그게 영생하는 방법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