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겅우 교수의 소년기 회고록 〈집 아닌 곳에서〉(Home is Not Here, 2018)에 이어 청년기 회고록 〈있는 곳이 집〉(Home is Where We Are, 2021)의 연재(축약)를 시작합니다.
1930년생의 왕 교수가 말라야에서 자라난 후 중국에 “귀국”해서 대학에 다니다가 공산화를 앞두고 말라야에 돌아오는 과정이 소년기 회고록에 담겨 있습니다. 싱가포르에서 대학을 다니고 영국에 유학한 후 말라야에 돌아와 말라야대학 교수로 활동하는 모습이 이제부터 연재할 청년기 회고록의 내용입니다. 1968년 오스트레일리아국립대학으로 옮겨갈 때까지입니다.
회고록은 쓴 사람을 보여주는 글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그친다면 자기 자손에게나 보여주면 됐지, 일반 독자에게 보일 필요가 없지요. 왕 교수의 회고록도 원래 자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80대에 접어든 어느 시점에서 일반 독자에게 보이기 위해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아버지, 할아버지의 입장을 넘어 역사가의 입장에서 자기가 산 시대를 보여주는 책이 되었습니다.
저는 왕 교수의 회고록을 읽는 것이 저와 독자들의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가로서 세계관이 무르익을 대로 익은 80대 연세에 현대사의 흐름을 알뜰하게 담아내는 이 작업에 나선 데는 경의에 앞서 감사를 느낍니다. 그리고 만 95세를 넘기신 이제 중년기 이후의 회고를 담은 〈국경은 없다〉(No Borders: Journeys Across Islands and Continents)가 일간 출간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김기협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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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언 – 집을 앞두고
성장기의 내게 고국(집)이란 중국이었다. 부모님이 떠나오신 곳이고, 우리가 언젠가 돌아갈 곳이었다. 내가 16세 때 우리는 마침내 그곳에 갔다. 그러나 부모님은 오래 계시지 못하고 난징에서 대학에 다니던 나를 남겨둔 채 도로 떠나셨다. 1년 후 인민해방군의 난징 공격이 임박하자 나도 말라야로 돌아오라고 부르셨다. 거기서 앞서의 책 〈집 아닌 곳에서〉(2018)가 끝났다. 사랑하던 고국으로 돌아가려는 부모님의 꿈이 끝난 시점이다. 그분들의 중국은 그분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혁명의 길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분들은 더 이상 “귀국(귀가)” 이야기를 하지 않으시게 되었다.
영국이 만든 “말라야연맹(Malayan Union)”은 말레이국가들을 포괄하는 보호령으로서 “말라야연방(Federation of Malaya)”이 되었다. 말라야공산당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위해 조직한 말라야민족해방군(MNLA, Malayan National Liberation Army)을 상대로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 아버지는 중국인 교육의 질적 향상을 직분으로 여기고 지역 중국인사회가 중국의 정치에 휘말리지 않아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계셨다. 말라야에서 살기로 결정하고 내게도 새 출발을 바라시는 것 같았다.
나는 1949년을 새 출발의 준비에 썼다. 대학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다. 싱가포르의 래플스대학과 에드워드8세 의과대학을 합쳐 말라야대학을 세울 방침이 발표되자 내 케임브리지 졸업시험으로 입학 자격이 될 것이라고 아버지는 생각하셨다. 그런데 내가 중국인인 데다 현지 출생도 아니라는 점이 문제가 될까 걱정하셔서 말라야 시민권 자격을 신청해 주셨다. 당시에는 그분도 나도 생각지 못한 일인데, 이 신청을 통해 나는 국가를 귀속의 대상으로 여기는 믿음을 이어갔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국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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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내 자리를 찾아
중국인이 되는 데 실패하고 말라야 시민이 되었다. 19세 생일을 앞두고 나는 두 개의 정체성을 획득했다. 대학생이 되고 말라야연방 시민이 된 것이다. 이제 중국인 체류자가 아니고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말라야가 내게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 그 이후 20년 동안 말라야를 “내 나라”로 삼는 길을 찾으며 지냈다.
행운의 연착륙이었다. 아버지가 나를 난징에서 불러온 것이 고등교육의 길을 가로막은 결과가 되지 않도록 확고한 결심을 하신 덕분에 가능하게 된 연착륙이었다. 나를 다시 다른 곳으로 보낼 형편은 아니었다. 말라야대학 설립 계획을 듣자 거기 들어가는 것이 내 학업을 계속할 유일한 길이라고 판단하셨다. 전쟁이 끝난 후 중국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고 내가 중등교육을 마칠 때까지 기다려주신 덕분에 가능하게 된 선택이었다.
1947년 중엽까지 중국행을 늦춘 덕분에 두 가지 혜택이 내게 돌아왔다. 받아놓은 졸업증서가 싱가포르의 새 대학 지원을 위한 자격을 충족해 주었고, 2년 더 지낸 기간이 새 헌법에 따른 연방 시민권 신청 자격을 충족해 주었다.
그 무렵에는 아버지도 말라야를 자리 잡아 살 곳으로 보는 생각으로 기울어지셨다. 지역 중국인 중 타이완의 중화민국 지지자들과 베이징의 신중국지지자들 사이의 정치적 분열을 예상하신 것 같다. 이제 말라야를 다른 어느 곳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부모님이 생각하게 되신 것처럼 느껴졌다.
말라야대학의 첫 번째 사명은 영국인 관리들의 행정을 도울 현지인의 훈련이었다. 이 영국식 대학은 미래의 국가를 가급적 영국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키워낼 사상과 제도의 전파에 나섰다. 식민지 관리들이 떠날 때 일을 물려받을 젊은 말라야인들이 선발될 것이었다. 제국이 끝나고 새로운 커먼웰스로 대치될 상황을 대비하는 제국 방략이었다.
대학은 1949년 10월 8일에 개교했다. 이 캠퍼스는 1962년에 싱가포르대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1980년에 다시 싱가포르국립대학교로 이름을 바꾼다. 1999년 개교 50주년 기념식 때 나는 이 학교가 식민지 이후 세계로 앞장서 뛰어든 선수였다고 설명했다. 개교 무렵 말라야는 힘든 시기를 앞두고 있었다. 우리는 지역의 거대한 변화에 대비하라는 경고를 받고 있었다.
동남아시아가 하나의 지역이라는 생각에 우리는 익숙하지 않았다. 우리 교과서는 대영제국과 커먼웰스의 모든 학교에서 쓰는 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 모든 학생이 케임브리지 시험위원회의 성적증명서로 평가받았다. 이 표준화 때문에 우리는 말라야나 그 주변 나라들에 관해 아는 것이 아주 적었다. 나는 그중 심한 편이었다. 영국식 학교나마 다닌 것은 내 교육의 절반뿐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고대중국을 이상화하는 가정교육이었다. 게다가 그 학교교육마저 일본 점령기로 토막난 것이었다.
“내 나라”로 삼으려는 말라야, 아무도 그 진로를 알지 못했다.
말라야 국가가 어떤 방향으로 발전해 나갈지 대다수 교수와 학생들은 분명히 알지 못했다. 서양에서 “국가”란 같은 언어와 종교를 가지고 장기간의 역사를 공유하는 사람들, 즉 “민족”의 개념에 근거를 두는 것이 보통이었다. 1948년에 갑자기 만들어진 정치조직들과는 관계없는 개념이었다. 나는 “말라야인”의 조건을 제일 적게 갖춘 사람의 하나였다. 아버지 출장을 따라다니며 페락 주의 몇 개 구역을 다녀 봤고 학교 친구들에게 페낭과 쿠알라룸푸르 이야기를 좀 들어본 정도였다. 싱가포르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더 적었다. 중국에 다녀올 때 그 항구를 경유했지만 기차역밖에는 기억에 남은 것이 없었다.
이포에 사는 동안 지역의 정치적 전망에 신경 쓰지 않고 지낸 것은 내가 중국으로 떠날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이 나라에 속하기로 마음먹은 이제 내가 어떻게 속할 수 있을지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립국들의 세계를 만들려는 거대한 반제국주의 운동의 일부로 우리 상황을 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세계에 자리 잡기 위해서는 영국인이 완전히 철수하는 상황에 대비해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반도 곳곳의 밀림지대에서 진행되는 비상사태의 투쟁 대상은 공산주의자도 아니고(그게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말라야인의 자유만을 위해 싸우는 민족주의자도 물론 아니고, “테러리스트”와 “비적(匪賊)”으로 불리는 무장집단이었다. 친구들은 두 패로 갈렸다. 한 패는 영국인들이 사실 떠날 마음이 없어서 한없이 뭉갤 것을 걱정했고, 또 한 패는 영국인이 공산당을 격파해 놓지 않고 떠나버리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다.
“탈식민화”라는 변화가 다른 곳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버마와 실론도 인도처럼 독립을 성취했다. 필리핀에도 독립이 주어졌다. 인도네시아인이라는 새로운 민족이 네덜란드인을 몰아내는 전쟁에 이겨 가고 있었다. 베트남인은 소련(및 중국)의 공산주의와 미국 자본주의 사이의 거대한 갈등에 말려드는 잔인한 운명을 맞았다. 두 진영의 경계선 위에서 이 투쟁은 정당한 독립전쟁의 의미를 벗어났다. 초강대국 사이의 대리전이 되어 1945년 이후의 아시아에서 가장 큰 전쟁이 되었다.
그러면 말라야는? 말라야공산당(MCP) 군대는 자기네 주장처럼 말라야 독립을 지향하는 민족주의 세력이었나? 그렇다면 평화로운 권력 이양을 통한 비폭력적 경로가 있는데도 그런 폭력적 수단을 취할 필요가 있었나? 영국군의 투입은 비상사태에 대한 대처를 위한 것이었나, 아니면 독립을 최대한 늦추려는 방편이었나?
진행되고 있던 투쟁에 얽힌 다양한 이해관계를 나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영국인 귀환 후 이포에 나타난 노동계의 불안한 사정은 나도 1947년 중국으로 떠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많은 시위와 체포가 있었다. 관심이 일어나기는 했으나 다른 곳으로 떠날 참인 나랑은 관계없는 일로 치부했다. 말라야연맹의 구상이 말레이인의 즉각적 반대를 받고 영국의 동기에 의심을 가진 다른 집단들도 상당히 회의적 태도를 보이던 사정이 생각났다. 나는 난징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어서 그 사정을 세심히 살피지 않았었다. 연방 시민으로 비상사태를 겪으면서 무슨 말을 하고 누구와 어울리는지 엄격한 통제를 받게 된 이제, 나도 자세를 바로 세울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