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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하자마자 이직 계획...100년만에 부활한 '떠돌이 기술

중앙일보

2026.03.0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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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민의 도쿄 리포트] 막내리는 ‘종신고용 100년 실험’

메이지(明治, 1868~1912) 후반, 일본 전역에 방적·제사 공장이 급증하던 시기의 일이다. 가난한 농촌에 아기가 태어나면 공장 모집인이 축하 인사를 빌미로 집을 찾아오곤 했다. 여자아이일 경우 그 자리에서 부모와 거래가 성사되었는데, 이른바 ‘전탁금(前貸金)’ 제도였다. 모집인이 거액의 현금을 빌려주는 대가로 아이가 10~12세가 되면 공장으로 보낼 것을 약속받는 식이었는데, 갓 태어난 영아의 노동력을 미리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 당시 첨단산업이었던 방적·제사 공장의 노동력은 대부분 이처럼 농촌에서 유입된 10대 여공들이었다. 이들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적합한 인력이었으나, 공장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며 수급 불균형이 발생하자 공장 간의 치열한 여공 쟁탈전이 벌어졌다. 기껏 확보한 인력을 빼앗기지 않으려 기숙사를 감시하고, 급료일 직후 도주를 막기 위해 밤새 보초를 세우는 공장이 생겨날 정도로 인력 확보 경쟁은 치열했다.

‘표주박형 인구’에 고령 인력만 넘쳐나
노동자를 둘러싼 쟁탈전은 방적·제사업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제철·조선·기계 등 중화학 공업에서는 사정이 더 극적이었다. 당시 일본의 숙련 기술자들은 와타리쇼쿠닌(渡り職人), 즉 ‘떠돌이 기술자’라 불렸다. 이들은 한 공장에 오래 머물지 않았고 더 좋은 임금과 조건을 제시하는 공장으로 거침없이 옮겨 다녔다. 1903년에 발간된 『직공사정(職工事情)』에 따르면 해군 구레공창(呉工廠)의 직공 4546명 중 근속 3년 미만이 절반을 넘었다.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에서는 매년 재적 노동자의 60~80%가 이직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전국 10개 공장을 대상으로 한 1901년 조사에서도 근속 1년 미만이 50~70%였고, 1919년 조사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이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대기업과 관영공장이 꺼내 든 카드가 정기승급제와 퇴직금 제도였다. 오래 머물수록 유리하게 만들어 숙련공의 이탈을 막겠다는 것이었다. 다이쇼(大正, 1912~26) 말부터 쇼와(昭和, 1926~89) 초에 걸쳐 만들어진 이 장치를 전시체제가 전 산업으로 확산시켰다. 국가총동원법 아래에서 노동 이동은 법률로 제한되었고, 와타리쇼쿠닌의 시대는 국가의 강제력으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전후 고도 성장기에 이 시스템은 종신고용, 연공서열임금, 기업별 노조라는 일본적 경영으로 완성되어 반세기 넘게 일본 경제를 떠받치는 기둥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 일본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을 목격하다 보면 지난 100년의 실험이 막을 내리고 다시 ‘와타리쇼쿠닌의 시대’로 회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2024년 일본의 이직자 수는 331만 명으로 3년 연속 증가세를 기록했으며, 그중 정사원의 이직률은 7.2%에 달해 코로나19 이전 수준을 훌쩍 넘어섰다. 흥미로운 점은 이직 이유 1위가 ‘낮은 급여(25.5%)’라는 사실인데, 이는 과거 와타리쇼쿠닌들이 한 푼이라도 더 높은 임금을 찾아 공장을 옮겨 다녔던 동기와 본질적으로 궤를 같이한다.

이러한 흐름은 2026년 현재 더욱 가팔라지고 있다. 올해 춘투(春闘)를 앞두고 게이단렌(經團連·일본경제단체연합회)은 베이스업 실시 검토를 아예 임금 협상의 스탠더드로 삼으라고 선언했고, 대기업들은 이미 2년 연속 5%를 상회하는 파격적인 임금인상을 단행했다. 인구 감소와 기업투자 확대로 인한 극심한 일손 부족 현상이 맞물리면서, 메이지 시대의 치열했던 인재 쟁탈전이 21세기 버전으로 재현되고 있는 셈이다. 거기에 더해 ‘이직 네이티브’라 불리는 Z세대는 입사하는 순간부터 이직을 전제로 자신의 커리어를 설계한다. 이들에게 종신고용이란 이미 박물관에나 박제된 과거의 유물일 뿐이다.

다만, 와타리쇼쿠닌 시대와 현재의 인력 이동 현상 사이에는 지난 100년간 일본 경제를 지탱해 온 종신고용 체제가 남긴 묵직한 구조적 흔적이 가로놓여 있다. 종신고용을 근간으로 하는 일본 기업들은 ‘신졸 일괄 채용’이라는 단일 파이프라인에 인력 수급을 전적으로 의존해 왔으며, 해마다 일정 수의 신입 사원을 수혈해 안정적인 연령별 피라미드를 구축해왔다. 문제는 경기 침체기가 닥칠 때마다 당장의 비용 절감을 위해 이 파이프를 잠가버렸다는 점이다. 그 결과 취업 빙하기와 리먼 쇼크 직후 단행된 대폭적인 채용 축소는 20년이 지난 지금, 조직의 중추가 되어야 할 중간 관리층 실종이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이른바 ‘표주박형 인력 구성’이라 불리는 이 기형적 현상은 현재 일본의 많은 대기업에서 관찰된다. 여기에 세대별 과잉과 부족이 공존하는 기묘한 이중구조가 인력 수급의 왜곡을 더욱 도드라지게 한다. 50대 정사원에 대해서는 약 40%의 기업이 여전히 고용 과잉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정작 그들의 빈자리를 채울 30~40대 중견 인재는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신입사원은 언제든지 이직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2025년 조기·희망퇴직을 모집한 상장기업은 43개사, 대상 인원은 1만7875명에 달했다. 중고년층은 밀어내면서도 젊은 인재는 언제 떠날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많은 기업이 일손 부족에 고심하고 있다.

그래픽=정수경 기자
일본 노동시장의 가장 기묘한 역설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기업들이 사상 최악의 인력난을 호소하며 파격적인 임금인상 경쟁에 뛰어들고 있음에도, 정작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여전히 마이너스의 늪을 헤매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2026년 1월 한 달간 발생한 인력 부족 관련 도산은 총 36건에 달하며 현장의 비명은 극에 달하고 있다. 이러한 절박함 속에 2024년부터 본격화된 고임금 인상의 흐름은 올해도 예외 없이 이어질 전망이다. 하지만 이처럼 전례 없는 수준의 명목임금 상승도 가파른 물가 상승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면서, 실질적인 가계 형편은 오히려 뒷걸음질치는 상황이 40개월 넘게 이어지고 있다.

그래픽=정수경 기자
인플레 못 따라가 실질임금 감소 추세
첫 번째 원인은 아베노믹스 이후 진행된 노동 공급의 확대에서 찾을 수 있다.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2012년 63% 수준에서 2025년 78%까지 치솟으며 북유럽 국가들과 비견될 수준에 도달했고 고령자 재고용 역시 급증했다. 문제는 새롭게 유입된 인력의 상당수가 파트타임이나 비정규직, 혹은 시니어 재고용과 같은 저임금 노동 형태였다는 점이다. 노동력의 양은 늘었으나 이것이 오히려 전체 평균임금을 끌어내리는 ‘구성 효과’를 낳았다. 일본은 그간 여성과 고령자라는 잉여 노동력의 저수지를 활용해 임금 상승 압력 없이 고용을 확대해왔기 때문에 임금인상이 정체되는 측면이 있었다.

두 번째 원인은 임금인상의 이중구조다. 대기업은 5%대 인상을 실현하지만, 고용의 70%를 차지하는 중소기업에서는 업적 개선 없이 인재 유출을 막기 위한 방어적 임금인상이 전체의 35.5%에 달한다. 연령별로도 임금인상은 젊은층에 집중되어 있고, 기업이 연공 커브의 플랫화를 추진하면서 중고년 임금은 억제되고 있다. 결국 대기업 젊은층의 높은 임금인상률이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하지만 중소기업과 중고년층 노동자, 비정규직의 정체된 임금이 전체 평균을 끌어내려 물가를 따라잡지 못하는 것이 실질임금 마이너스의 구조적 본질이다.

총선 압승으로 강력한 정치 기반을 확보한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총리는 긴축재정이 경제의 축소균형을 낳는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방위비 증대와 감세 기조로 인해 재정 적자가 심화될 가능성이 크고 무엇보다 물가 상승이 임금인상을 압도하여 실질임금이 뒷걸음질치는 상황에서 재정 확장은 자칫 인플레이션을 더 자극할 위험이 있다. 내수를 살리기 위해 감세와 보조금을 쏟아부어도, 풀린 돈이 다시 물가를 밀어 올린다면 결국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의 악순환만 이어질 뿐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물가 안정과 내수 진작을 동시에 달성해야 하는, 마치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모순적인 미션을 완수해야 하는 난제에 직면해 있다.

메이지의 와타리쇼쿠닌들은 더 나은 임금을 찾아 공장에서 공장으로 떠돌았다. 기업들은 그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종신고용이라는 장치를 발명했고 100년간 작동했다. 지금 일본의 노동시장은 그 장치가 해체된 뒤 다시 노동자가 자유롭게 이동하는 시대로 돌아가고 있다. 다만 100년 전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하나 있다. 그때는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었고, 지금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사나에노믹스의 성패는 팽창의 시대에 설계된 낡은 시스템을 수축의 시대에 걸맞게 재설계할 수 있느냐는 본질적인 응답에 달려 있다.

이창민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 한(고려대)·일(도쿄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일본학 3세대 학자. 도쿄공업대 교수를 거쳐 2014년부터 한국외대에서 재직 중이다. 『지금 다시, 일본 정독』 『아베노믹스와 저온호황』 『제도와 조직의 경제사』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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