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유가가 4년 만에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서면서 산업계에 비상등이 켜졌다. 최근까지 유가 약세를 전제로 경영 계획을 세웠던 기업들은 ‘비용 계산서’를 다시 써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됐다.
9일 국제 유가 지표인 브렌트유와 서부텍사스산원유(WTI)는 모두 배럴당 100달러 선을 넘어섰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주요 기관들은 올해 유가를 60달러 안팎으로 예상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지난달 12일 석유 시장이 올해 공급 과잉 국면에 들어설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고, 투자은행(IB) JP모건은 2027년 말까지 국제 유가가 30달러대로 추락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란 전쟁 여파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유가가 배럴당 150달러까지 치솟을 수 있다는 관측마저 나온다.
장밋빛 전망이 나왔던 항공업계에는 먹구름이 드리웠다. 국제항공운송협회(IATA)는 2026년 글로벌 항공업계가 사상 최대치인 410억 달러(약 61조원)의 순이익을 기록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이는 브렌트유 가격을 배럴당 62달러로 가정해 발표된 것이다.
IATA에 따르면 항공업계 평균 순이익률은 3.9% 정도다. 전체 비용의 25%를 차지하는 연료비가 오르면 수익성이 빠르게 악화되는 구조다. 대한항공의 연간 예상 유류 소비량은 약 3050만 배럴로 유가가 1달러 오르면 약 3050만 달러(약 453억원)의 비용이 늘어난다. 아시아나항공 역시 유가 1달러 변동 시 약 1155만 달러(약 171억원)의 손익 변동이 발생한다.
대형 항공사들은 유가 급등에 대비해 헤지(위험회피) 계약을 맺고 있다. 대한항공은 연간 예상 연료 사용량의 최대 50%에 대해, 아시아나항공은 약 30% 규모의 헤지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유가가 계속 오르면 유류할증료 인상 등 추가 대응이 불가피하다는 관측이다.
정유·석유화학 업계도 비상이다. 한국은 원유 수입의 70.7%를 중동 지역에 의존하고 있다. 원유와 나프타 등 핵심 원료 수급에 차질 가능성이 제기되자 여천NCC는 주요 고객사에 제품 공급이 일시적으로 지연될 수 있다고 통보했다.
석화업계에선 상황이 길어질 경우 일부 공장 셧다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한 석화업계 관계자는 “쌓아둔 재고로 버티고 있지만, 한 달 이상 사태가 장기화하면 얘기가 전혀 달라지기 때문에 전 부서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고 전했다.
해운업계의 경우 선박 연료인 벙커씨유 가격 상승으로 운항비가 늘고, 전쟁 위험료가 붙어 보험료 부담이 커질 수 있다. 유가 변동은 반도체·철강 등 전력을 많이 쓰는 산업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산업용 전기요금이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약 70% 오른 가운데 유가 불안까지 이어지면 추가 인상도 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AI 수요로 전력 사용이 늘어난 반도체 업계의 비용 압박도 커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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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차례 고유가 시기, 기업 대응은
산업계에서는 과거 고유가 시기 기업들이 취했던 대응 전략이 다시 거론되고 있다. 국제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섰던 때는 2007~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 2011~2014년 중동 정세 불안기,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시기 등이다.
당시 기업들은 ▶원가 상승분을 제품 가격에 반영하는 가격 전가 ▶감속 운항 등 연료 절감 ▶수익성 중심의 사업 포트폴리오 조정 ▶에너지 효율 투자 등 방식으로 대응했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기업이 유가 상승폭 만큼 수출 단가를 올리기는 어렵다는 게 문제”라며 “불확실성이 커진 만큼 민감 업종은 연간 목표와 비용 전망을 다시 점검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