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소 멤버들이 오랜만의 저녁 식사를 위해 모인다. 세훈과 찬열은 음식을, 디오는 음악을, 레이와 수호는 주문 제작 케이크를 준비했다. 음료는 카이가 맡았다. 수호가 준비한 케이크엔 익숙한 문구가 적혀있다. “사랑하자”
지난 1월 19일 컴백한 보이그룹 엑소의 여덟 번째 앨범 ‘리버스(REVERXE)’에 수록된 단편소설 ‘EX-VISION’의 도입부다. “사랑하자”는 엑소가 데뷔하던 2012년, 수호가 직접 만든 엑소의 구호다. 소설엔 이 구호 외에도 엑소의 세계관을 상징하는 ‘생명의 나무’ ‘개기월식’ ‘붉은 기운’ 등 팬이라면 바로 알아챌 소재들이 녹아있다.
이 소설은 이희주 작가가 썼다. 그는 K팝 아이돌 팬 문화를 소재로 한 장편소설 『환상통』(2016), 『성소년』(2021)과 소설집 『크리미(널)러브』(2025) 등을 낸 10년 차 소설가다. SM에서 작가의 소설을 앨범 구성품으로 내놓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K팝 아이돌 그룹과 한국문학 작가들 간 협업이 늘어나고 있다. 컴백 콘셉트와 잘 어울리는 글을 발표하거나 아이돌 그룹의 세계관 완성도를 높일 서사를 만들고 아이돌을 주인공으로 한 짧은 소설을 앨범에 싣는 등 다양한 양상이다.
이희주 작가는 “SM엔터테인먼트 측에서 ‘엑소가 긴 공백기를 거쳐 컴백하는 만큼, 엑소 세계관을 바탕으로 소설을 써주면 좋겠다’고 제안해왔다”고 밝혔다. SM의 모나리 SMCU개발유닛장은 “아티스트가 가진 세계관과 설정에 서사를 덧대고, 그 흐름을 앨범 콘셉트와 다양한 콘텐트로 일관되게 확장해 나가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엑소가 지금까지 쌓아 온 서사를 짧은 소설 형태로 정리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협업 계기를 밝혔다.
스타쉽엔터테인먼트의 막내 걸그룹 키키는 지난해 3월 데뷔 앨범부터 꾸준히 이슬아 작가와 협업하고 있다. 2018년부터 ‘일간 이슬아’라는 이름으로 e메일 산문 연재를 진행하고, 장편소설
『가녀장의 시대』(2022) 등을 출간한 작가다. 그는 키키의 데뷔 앨범 ‘언컷 잼(Uncut Gem)’과 디지털 싱글 ‘댄싱 얼론(DANCING ALONE)’에 작사가로 참여했다. 지난 1월 26일 키키가 두 번째 EP ‘델룰루 팩(Delulu Pack)’로 컴백했을 땐 키키 홈페이지(kiiikiii.kr)에 ‘드레스 입고 달리기’란 제목의 단편소설을 공개했다.
스타쉽은 2022년에도 걸그룹 아이브의 세 번째 싱글 앨범 ‘애프터 라이크’의 컴백 프로모션 영상을 제작하며 『보건교사 안은영』(2015) 등을 쓴 정세랑 소설가와 내레이션 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하이브는 2022년 걸그룹 르세라핌의 두 번째 미니앨범 ‘안티프래질(ANTIFRAGILE)’에 수록된 프롤로그 파트를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2019) 등을 쓴 김초엽 소설가에게 맡겼다.
이들이 쓴 글은 K팝 아이돌을 주인공 삼아 썼다는 점에서 ‘팬픽’(Fan Fiction)의 성격을 띠지만, 문학성도 포기하지 않는다. 이희주 작가는 “멤버들의 성격과 서사를 알기 위해 뮤직비디오 등을 참고했지만, 문장과 서사를 구상할 땐 소설을 쓸 때와 다르지 않았다”고 전했다.
시인과의 협업도 있다. 레드벨벳 조이는 지난해 첫 번째 미니앨범 ‘프롬 조이, 위드 러브’로 컴백하며 평소 좋아하던 작가인 차정은 시인과 협업했다. 시집 『토마토 컵라면』(2023) 등을 쓴 차정은 작가는 “사랑에 관한 키워드와 노래 가사 정도만 전달받고 글을 쓰게 됐다. 산문에 가까운 글”이라고 소개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K팝 업계가 서사를 만드는 ‘전문가’로서 소설가·시인들을 호명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김정섭 성신여대 문화산업예술학과 교수는 “K팝 팬은 작가들이 쓴 완성도 높은 글을 통해 가수의 이미지에 더욱 몰입하게 된다”며 “글이 콘셉트 해석의 영역을 넓히고, 새로운 담론을 유발하는 등 2차 콘텐트의 매개가 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K팝 가수들에게 차별화된 캐릭터성을 부여하기 위해 협업이 늘어났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임희윤 음악평론가는 “최근의 K팝 가수들을 보면 기획사의 지휘 아래 활동해야 하고, SNS 등 개별 활동이 엄격히 제한되는 등 개별 서사를 쌓기 어려운 환경에 놓여있다”고 말했다. 이어 “서사를 부여하기 위해 소설가나 시인을 찾는 역설적 현상이 나타났다고 볼 수도 있다”며 “앞으로도 이러한 교류는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