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서며 산업계에 비상등이 켜졌다. 최근까지 유가 약세를 전제로 경영 계획을 세웠던 기업들은 ‘비용 계산서’를 다시 써야 할 상황에 놓였다.
9일 브렌트유와 서부텍사스유(WTI)는 모두 배럴당 100달러 선을 넘어섰다. 한 달 전만 해도 주요 기관들은 올해 유가를 60달러 안팎으로 전망했지만, 이란 전쟁이 발생하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당장 항공업계에는 먹구름이 드리웠다. 국제항공운송협회(IATA)는 2026년 글로벌 항공업계 순이익이 사상 최대치인 410억 달러(약 61조원)에 이를 것으로 봤지만, 이는 브렌트유 가격을 배럴당 62달러로 가정한 수치다. 항공업은 전체 비용의 25%를 차지하는 연료비가 오르면 수익성이 빠르게 악화하는 구조다. 대한항공의 연간 예상 유류 소비량은 약 3050만 배럴로, 유가가 1달러 오르면 비용이 약 3050만 달러(약 453억원) 늘어난다.
정유·석유화학 업계도 비상이다. 원유와 나프타 등 핵심 원료 수급 차질 가능성에 여천NCC는 고객사에 제품 공급이 일시 지연될 수 있다고 통보했다. 사태가 길어지면 일부 공장 가동 중단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전망이 나온다.
해운업계는 선박 연료 가격 상승으로 운항비가 늘고 전쟁 위험료가 붙어 보험료 부담이 커질 수 있다. 반도체·철강 등 전력을 많이 쓰는 산업도 유가 변동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업계에선 과거 고유가 시기에 취했던 대응 전략 카드를 들여다보고 있다. 국제유가가 100달러까지 상승했던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2007~2008년), 중동 정세 불안기(2011~2014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시기(2022년) 등이다.
당시 기업들은 ▶가격 전가 ▶감속 운항 등 연료 절감 ▶사업 포트폴리오 조정 ▶에너지 효율 투자 등으로 대응했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유가 상승 폭만큼 수출 단가를 올리기 어려워 기업들의 목표도 수정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제 가장 먼저 타격을 체감하고 있는 건 중소 제조업계다. 전북에서 플라스틱 가공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A대표는 “t당 150만원이었던 플라스틱 원재료 가격이 170만원대로 올랐다. 판매가에서 원자재 비용 비중이 60%를 넘는데 납품 단가는 못 올리니 속이 타들어 간다”고 했다.
중소기업들은 장기 계약으로 원료나 물류망을 확보해 놓은 대기업과 달리 유가·환율 변동에 대한 대비책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연료비에 운송비, 원재료비, 보험료까지 오르면 원가 상승률이 2~3%대에 불과한 영업이익률을 넘어서 ‘팔수록 손해’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식탁 물가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밀가루·설탕·팜유·옥수수·대두 등 핵심 원재료가 모두 수입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커피·초콜릿 등 일부 가공식품은 가격 인상 가능성도 점쳐진다.
직장인 이모(47)씨는 “최근 투자한 주식이 많이 올라 씀씀이가 좀 커졌는데, 기름값이 오르고 주식까지 폭락하는 걸 보니 정신이 번쩍 난다”며 “신차 구매도 당분간 접었다”고 털어놨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연구본부장은 “오일쇼크 장기화 가능성에 대비해 서민 물가 안정과 실물경제 회복을 모두 고려하는 거시경제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