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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식당 종업원 신세경은 왜 패티김의 명곡 '이별'을 불렀나

중앙일보

2026.03.10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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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휴민트'에서 패티김의 '이별'을 부르는 북한식당 여종업원 채선화(신세경). 사진 NEW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냉정한 사람이지만/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잊을 수는 없을 거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북한 식당 종업원 채선화(신세경)가 무대에 올라 애절한 목소리로 패티김의 '이별'을 부른다. 선화의 옛 연인이자, 사건 조사를 위해 급파된 북한 보위성 조장 박건(박정민)은 노래를 들으며 추억에 젖는다.

영화 '휴민트'(지난달 11일 개봉) 초반부의 한 장면이다. 슬픈 멜로디에 실린 가사가 영화 속 채선화와 박건의 비극적 운명을 암시한다.

영화 '휴민트'에서 북한 보위성 조장 박건(박정민)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옛 연인 채선화(신세경)를 재회한다. 사진 NEW
1973년 발표된 '이별'은 작곡가 길옥윤이 패티김과의 이혼을 앞두고 만든 노래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애창곡으로 알려져 있다. 패티김은 "1999년 평양 공연 때 북측으로부터 '이별'을 꼭 불러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휴민트' 제작사인 외유내강 관계자는 "북한에서 인기 많은 '사랑의 미로'(최진희)와 '이별'을 놓고 고심했지만, 노래 분위기와 가사 때문에 '이별'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노래를 직접 선곡한 류승완 감독은 "아름다운 이별에 대한 고민이 영화에 담겼고, 그 감정선을 담아낼 수 있는 노래로 '이별'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영화 주제곡이 영화의 정서를 표현하는데 그치지 않고, 서사와 메시지까지 담아내고 있다. 특히 영화의 주제를 떠올리게 하는 가사의 옛 가요들이 선호되는 추세다.

만약에 우리
26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한 멜로 영화 '만약에 우리'(지난해 말 개봉)에선 '사랑은 봄비처럼 이별은 겨울비처럼'이 영화의 정서와 서사를 대변했다. 가수 임현정이 2003년 발표한 노래는 영화 흥행과 더불어 인기를 누리며, 음원 차트에서 역주행했다.

극중 정원(문가영)의 미니 홈피 배경 음악으로 삽입된 노래는 은호(구교환)와의 10여 년에 걸친 사랑과 이별의 서사를 관통하는 정서적 축 역할을 한다. 김장우 음악 감독은 "노래가 인기를 끌던 때와 영화의 시간대가 일치하는 데다, 영화의 주제와 감성과도 맞아 떨어져 김도영 감독에게 이 곡을 추천했다"면서 "원곡자인 임현정 씨도 흔쾌히 사용을 허락해줬다"고 말했다.

영화 '좀비딸'의 정환(조정석)은 좀비로 변한 딸 수아(최유리)를 사람으로 돌려놓기 위해 온갖 훈련을 시키는 등 고군분투한다. 사진 NEW
지난해 한국 영화 최고 흥행작(564만 관객)인 '좀비딸'에선 2002년 발표된 가수 보아의 히트곡 'No.1(넘버 원)'이 주제곡으로 사용됐다. 좀비로 변했지만 여전히 소중한 딸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부성애를 표현하는 최적의 노래였다는 평가다.

박찬욱 감독은 추억의 가요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대표적인 연출가다. 지난해 9월 개봉한 '어쩔수가없다'에선 조용필의 명곡 '고추잠자리'가 영화 못지 않게 화제가 됐다.

영화 '어쩔수가없다'에서 만수(이병헌)가 자신의 구직 경쟁자인 범모(이성민)를 제거하려 하는 장면. 사진 CJ ENM
만수(이병헌)와 그의 구직 경쟁자 범모(이성민), 범모의 아내 아라(염혜란)가 한데 뒤엉키는 코믹한 몸싸움 신에서 '엄마야 나는 왜/자꾸만 슬퍼지지/엄마야 나는 왜/갑자기 울고 싶지'라는 가사가 아련한 선율과 함께 흐른다. 생존을 위해 범모를 죽여야 하는 만수의 처절한 심경과 비극적 아이러니가 극대화되는 순간이다.

'헤어질 결심'(2022)은 박 감독이 가수 정훈희의 노래 '안개'(1967년)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영화다. '생각하면 무엇 하나 지나간 추억/그래도 애타게 그리는 마음/그 사람은 어디에 갔을까/안개 속에 외로이 하염없이 나는 간다'는 가사가 서로에게 닿지 못한 남녀 주인공의 비통한 마음과 충격적인 결말을 암시한다.

박찬욱 감독, 박해일, 탕웨이 주연의 '헤어질 결심'은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됐다. [사진 CJ ENM]
요즘 영화들의 대표 삽입곡으로 옛 가요들이 자주 사용되는 이유는 뭘까. 우선, 영화 흥행의 키를 쥐고 있는 중장년층 관객들에게 어필하기 위한 목적을 꼽을 수 있다. 복고풍 사운드에 정통한 가수 장기하가 음악 감독을 맡은 '밀수'(2023, 류승완 감독)가 대표적인 예다.

'밀수'에는 최헌의 '앵두', 김트리오의 '연안부두', 펄 시스터즈의 '님아', 산울림의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등 시대를 풍미한 가요들이 영화 곳곳에 배치됐다. 시나리오 단계부터 이 노래들을 선곡한 영화는 의도대로 중장년 관객들을 불러들이며 514만 관객을 모았다.

'헤어질 결심', '어쩔수가없다', '휴민트' 등의 음악을 담당한 조영욱 음악 감독은 "청년 시절 가요로 음악적 감수성을 키운 영화 감독들의 취향이 삽입곡 선곡에 반영되는 측면도 있다"면서 "그게 중장년 관객의 정서와도 맞아 떨어지며, 명곡을 재발견하는 영화적 재미를 만든다"고 말했다.

옛 가요들이 요즘 노래들과 달리, 서사적 완결성을 갖추고 있는 점 또한 영화 삽입곡으로 선호되는 이유다. 임희윤 대중음악평론가는 "시적인 가사, 서정적 멜로디의 옛 가요들이 영화의 분위기와 주제를 부각시키는데 유용한 재료가 되고 있다"면서 "예전 가요들을 고전처럼 받아들이고 소비하는 젊은 층에게도 새로운 발굴의 의미를 제공한다"고 분석했다.

김장우 음악감독은 "기계적으로 튜닝한 요즘 곡들과 달리, 예전 가요들은 빈티지하고 인간적인 느낌이 나기 때문에 관객의 정서적 몰입을 높여준다"며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고전 팝송들이 자주 사용되는 추세"라고 말했다.



정현목([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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