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이란 수도 테헤란시 바나크(Vanak) 광장 인근의 주이란 한국 대사관. 이곳의 직원들은 여명이 들기 전 깨어나 부지런히 김밥을 말고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이날 새벽 1300km에 달하는 험난한 육로 대피에 나설 한국 교민 23명이 버스 안에서 먹을 ‘피난 식량’이었다.
직전까지 외교부 본부와 현지 대사관은 교민을 초기에 탈출시키는 방안을 적극 추진할지, 아니면 확전 여부를 주시하며 자택 대기(shelter-in-place)로 가닥을 잡을지 두 가지 선택지를 두고 난상 토론을 벌인 터였다. 결론은 바로 이날 새벽이 융단폭격을 피할 골든 타임이라는 것. 이틀 전인 지난달 28일 이란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가 미·이스라엘 연합군의 정밀 타격으로 사망했지만, 테헤란 도심까지는 아직 전운이 덮치지 않은 상태였다.
새벽 대사관 앞으로 집결한 교민들은 일제히 대사관 임차 버스에 몸을 실었다. 행선지는 이란-투르크메니스탄 국경이었다. 이는 두서없는 엑소더스가 아니었다. 지난해 6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첫 이란 타격이 이뤄졌을 당시 준비해 둔 비상 탈출로였다. 정세가 심상찮던 지난 1월부터 외교부 본부와 현지 공관은 상시 합동 점검 회의를 계속 열었고, 투르크메니스탄 당국과 국경 통과 절차 협의까지 일찌감치 마쳐뒀다.
적시의 판단은 대참사를 막았다. 교민들을 태운 버스가 테헤란 시내를 벗어난 지 불과 몇 시간 뒤 도심 한복판으로 대규모 폭격이 시작됐다. 대사관 인근에 포탄이 떨어져 직원 숙소마저 파손될 만큼 폭격은 전방위적이었지만, 한국 피난 행렬은 이미 사지를 벗어난 뒤였다.
일촉즉발의 현장 곳곳에선 외교관들이 기지를 발휘해 고비를 넘겼다. 짙은 안개 속 얼어붙은 좁은 도로를 서행하던 대피 버스와 통신이 두절되며 위기가 찾아왔다. 도착 시각을 훌쩍 넘겨도 버스가 국경지대에 나타나지 않자 현지에 급파된 외교부 신속대응팀(단장 임상우)은 발을 동동 굴렀다.
이때 서울에서 휴가 도중 사태를 접하고 전쟁터인 이란으로 급거 복귀한 한재철 영사가 구원투수로 나섰다. 이란-투르크메니스탄 국경 지대로 곧장 달려간 그는 이란 통신망 유심칩이 꽂힌 휴대전화를 들고 이란 내를 이동 중인 버스 내부 인솔자와 교신하며 무사 도착을 이끌었다.
국경 검문소에선 읍소전도 벌어졌다. 한 교민이 이란인 배우자는 물론 현지 친척들까지 데리고 국경을 넘으려 하자 투르크메니스탄 당국이 “우리가 이 검문소에서 허가한 것은 한국인들의 입국이다. 여긴 이란인들의 도피처가 아니다”며 난색을 보였다. 그러자 이 교민은 “가족을 두고 혼자 살겠다고 갈 순 없다”며 탈출을 포기했고, 한재철 영사는 해당 일가족을 직접 인솔해 거꾸로 이란 땅으로 다시 들어섰다. 그러나 외교부 신속대응팀이 투르크메니스탄 외교 차관 등을 상대로 막후 설득을 이어갔고, 결국 검문소에서 예외적인 입국 허용 조치를 취했다. 해당 교민과 일가족은 다시 발길을 돌려 무사히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
10일 외교부 당국자에 따르면 구출 작전은 현재 진행형이다. 외교부 신속대응팀은 이란뿐 아니라 이스라엘에서도 체류객 120여 명을 이집트 육로를 통해 안전하게 탈출시킨 상태다. 여기에 더해 정부는 이스라엘(30여 명)과 이란(10명 이내) 잔류 교민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2차 육로 대피 계획도 물밑에서 준비 중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9일 엑스(X)를 통해 “외교부, 잘하고 있다. 누구보다 빠르게 안전하게”라고 칭찬한 이유는 이런 배경이다. 조현 장관이 앞서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 발 전세기가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206명의 탑승객이 무사히 귀국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고 밝힌 글을 재공유하면서 이례적인 칭찬을 남긴 것이다.
이 대통령이 ‘누구보다’란 수식어를 쓴 건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도 신속한 교민 대피가 이뤄진 현 상황과 부합하는 측면이 있다.
특히 미국 국무부의 재외국민 대피 관련 대응은 ‘각자도생’을 요구하는 수준이라는 게 현지 여론의 평가다. 공습 이틀 뒤인 지난 2일(현지시각)에야 중동 14국에 체류 중인 자국민을 향해 “상업 항공편을 이용할 수 있을 때 즉각 대피해야 한다”는 뒤늦은 대피령을 내렸다. 지난 3일 워싱턴포스트(WP) 보도에 따르면 미 국무부는 쿠웨이트·사우디아라비아·레바논 주재 미국 대사관부터 전면 철수 조치했다. 당시 미 국무부 비상 콜센터는 자국민을 상대로 “현재 미국 정부에 대피를 의존하지 마십시오. 최신 정보를 위해 대사관 웹사이트를 계속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는 자동응답 메시지만 송출했다고 한다.
주요 외교 시설의 폐쇄는 공관원 안전을 위한 조치였지만, 중동을 떠나고자 하는 자국민 지원 차질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지난 7~8일 UAE에서 전세기를 띄우려 했지만 정작 이런 일정을 제대로 공유 받지 못한 자국민이 아무도 나타나지 않아 운항이 취소되는 촌극도 있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3일 백악관에서 ‘왜 대피계획이 마련되지 않았느냐’는 취재진 질문에 “모든 게 너무 급하게 일어났다(Well, because it happened all very quickly)”고 답했다. 다만 이번 전쟁이 이스라엘과 미국의 공습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준비가 미비했다는 지적을 피해가긴 어려워 보인다.
미 하원 외교위원회 그레고리 믹스 간사(민주당)가 지난 9일 엑스에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을 겨냥해 “트럼프 대통령이 폭격을 시작할 때까지 중동에 있는 뉴욕 시민과 미국인들을 대피시킬 계획을 세워두지 않았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지도력의 실패”라고 비판한 이유다.
이와 달리 한국의 경우 중동 주재 대사관 한 곳도 전면 철수하지 않았다. 외교부 당국자는 “국민이 남아있는 한 가장 마지막 순간까지 대사관은 남아 있을 것”이라며 “직원 다섯명만 주재하는 요르단 대사관의 경우에도 매일 공항으로 출근해 출국하려는 한국민들을 대신해 통역과 수속절차를 대행해주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