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 해협에 감도는 전운이 한국 가전업계를 흔들고 있다. 단순히 기름값·환율이 올라서가아니다 . ‘산업의 비타민’으로 불리는 알루미늄·황 등 기초 소재의 가격도 덩달아 뛰었다. 그 결과 국내 기업의 제조원가 부담도 커지고 있다.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 전쟁이 부른 나비효과다.
10일 트레이딩이코노믹스에 따르면 9일(현지시간) 런던금속거래소(LME)의 3개월물 알루미늄 선물 가격은 t당 3385.5 달러로 전년 대비 약 26% 올랐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했던 2022년 이후 4년만의 최고치다. 알루미늄은 가전제품이나 스마트폰 몸체(프레임)뿐 아니라 냉장고 냉매 배관과 증발기, 세탁기 모터와 제어판 등 제품 주요 부품에 사용되는 핵심 소재다.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며 중동산 원자재 공급이 차질을 빚게 되자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전 세계 알루미늄의 약 10%를 생산하는 중동은 중국(59%) 다음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원료 산지다. 알루미늄도 원유처럼 호르무즈 해협을 통해 전 세계로 운송된다. 이미 에미리트 글로벌 알루미늄(EGA), 알루미늄 바레인(Alba), 사우디 마렌 등 중동 지역의 주요 알루미늄 제련업체는 일부 고객사에 제품 공급이 지연될 수 있다는 사실을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황 가격도 출렁이고 있다. 국제 황 가격은 t당 661달러로 전년보다 약 90% 급등했다. 황을 산화시켜 만든 황산은 니켈·구리 등 금속을 추출할 때 사용되는 핵심 원료다. 삼성선물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호르무즈 해협 운항이 장기간 제한될 경우 공급 부족으로 인해 황산 가격이 상승하고 일부 금속 제련업체들이 생산량을 줄일 가능성이 있다. 특히 인도네시아 니켈 제조사와 아프리카 구리 광산이 중동산 황산 의존도가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동 지역은 전 세계 황산 공급량의 약 25%를 책임지고 있다.
황산 공급이 차질을 빚게 돼 니켈·구리 등의 생산 단가 상승할 경우 이를 원재료로 쓰는 가전제품과 배터리까지 연쇄적으로 가격이 오를 수 있다.
적자 탈출을 꿈꾸던 국내 가전업계는 유탄을 맞는 분위기다. 가뜩이나 글로벌 수요가 위축돼 시장이 쪼그라들고 있는 가운데 원자재 수입 단가까지 올랐기 때문이다.
여기에 물류비까지 오르며 가전업계의 짐을 지운다. 6일 발표된 상하이컨테이너운임지수(SCFI)는 지난달 27일보다 156.08포인트 오른 1489.19를 기록했다. 전주 기준 상승 폭인 81.65포인트의 2배에 달하는 수치다. 특히 중동 노선 운임은 1TEU(20피트 컨테이너 1개)당 2287로 72.3% 올랐다. 연료비(유가)와 보험료가 큰 폭으로 치솟았다.
삼일PwC경영연구원은 보고서를 통해 “전자업체는 생산 연속성을 확보하기 위해 운송비가 올라도 고비용 물류 수단을 활용할 수밖에 없다”며 “이는 수익성 악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가전업계는 사태가 장기화할 가능성을 가장 우려하고 있다. 이미 국내 업체의 체력은 소진된 상태다. 지난해 4분기 삼성전자 생활가전(DA)ㆍ영상디스플레이(VD) 부문은 영업손실 6000억원을 기록하며 전년 대비 적자 전환했다. 직전 분기(영업손실 1000억원)에 이어 2분기 연속 적자다. 이 기간 LG전자 생활가전(HS)ㆍ미디어 엔터테인먼트 솔루션(MS) 사업본부도 합산 영업손실 4326억원을 기록했다. TV 사업을 담당하는 MS사업본부는 지난해 2분기부터 적자를 지속했고, 연간 영업손실 7509억원에 이른다. 가전·TV 수익성이 악화되며 지난해 4분기 LG전자(전사)는 영업손실 1090억원으로 9년 만에 분기 적자 전환했다.
TV를 비롯해 냉장고·세탁기 등 생활 가전의 수익성이 악화하고 있는 이유는 제품 교체 수요가 길어지며 시장 성장성이 둔화한 반면 업체 간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기 때문이다. 특히 저가 제품을 앞세운 중국 가전업체들은 해외뿐 아니라 국내 시장에서도 바짝 추격하고 있다. 시장 방어를 위한 마케팅 비용이 증가한 것도 수익성 악화의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가전업계 관계자는 “최근 주력 제품으로 인공지능(AI) 프리미엄 가전을 내세우고 있지만 반도체 가격까지 올라 제조 비용이 만만치 않다”며 “수익성을 회복하면서도 경쟁력 있는 가격으로 소비자 수요를 창출해야 하는데 마땅한 해법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