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개막을 하루 앞둔 지난 5일 일본 도쿄돔. 한국 야구대표팀 훈련 종료를 앞두고 한 외신 기자가 안현민(23·KT 위즈)에게 짧은 인터뷰를 청했다.
싹싹한 안현민이 밝은 표정으로 “오케이”를 외치며 멈춰 선 순간, 이정후(28·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다가왔다. 해당 기자에게 양해를 구한 그는 안현민을 더그아웃 뒤로 데리고 나갔다. 잠시 후 안현민은 영어에 능통한 KBO 직원과 함께 나타났다. 다음날 당시 상황을 묻자 이정후는 “정식으로 통역을 거쳐 답변하라는 조언을 건넸다”고 설명했다.
관련해 이정후는 “말이라는 게 토씨 하나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거나 해석될 여지가 있다. 메이저리그(MLB)에선 영어를 꽤 잘하는 외국인 선수들도 반드시 통역을 대동해 인터뷰한다”면서 “혹여 현민이가 무심코 던진 영어 한마디가 잘못 전달돼 야구 외적으로 스트레스받는 일이 생길까 봐 미리 방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표팀 주장으로서 그의 존재감을 드러낸 장면이다.
이정후는 명실상부한 한국 야구 간판 스타다. 일본에서도 많은 팬을 몰고 다녔다. 그가 첫 경기부터 착용한 목걸이(반클리프 아펠 제품)는 WBC 1라운드 내내 화제였다. 네잎 클로버 모양 펜던트 여러 개가 목을 감싼 형태인데, 이정후를 포함해 빅리거 다수가 애용하는 제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정후는 “클로버의 행운이 한국 대표팀에 깃들길 바라는 마음으로 경기 때만 착용했다. 이렇게 주목 받을 줄은 몰랐다”며 미소 지었다.
일본전에 앞서 상대 선발 기쿠치 유세이(LA 에인절스) 공략법을 찾는 과정도 이정후가 주도했다. 그는 “나와 저마이 존스(디트로이트 타이거스)는 MLB에서 기쿠치를 상대한 경험이 있다”면서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나름의 비법을 우리 선수들과 공유했다”고 귀띔했다. 한국은 접전 끝에 ‘디펜딩 챔피언’ 일본에 6-8로 분패했지만 1회 기쿠치를 상대로 3점을 뽑아내 막판까지 치열한 시소게임을 이어갔다.
이정후를 앞세운 야구대표팀은 기적에 가까운 야구 드라마를 완성하며 포효했다. 지난 9일 호주와의 1라운드 최종전을 앞두고 ‘5점 차 이상 2실점 이하’라는 까다로운 승리 공식을 받아 들었는데, 정확히 일치하는 스코어(7-2)로 2009년 이후 17년 만의 WBC 8강행을 성사 시켰다.
이정후는 이 경기에서도 남다른 존재감을 발산했다. 9회 말 1사 1루에서 우중간을 가를 뻔했던 상대 타자 릭슨 윈그로브의 2루타성 타구를 슬라이딩 캐치로 잡아내 실점을 막았다. 당시 그의 글러브에 빨려 들어온 건 야구공이 아니라 (2라운드 경기 장소인) 미국 마이애미행 한국야구대표팀 전원의 전세기 티켓이었다. 이정후는 “우리 선수들이 미국에서 MLB의 시스템을 경험할 수 있게 돼 정말 좋다. 각자의 야구 인생에 의미 있는 동기 부여 기회로 작동하길 바란다”고 기대감을 표시했다.
한국은 오는 14일(한국시간) 미국 마이애미 론디포파크에서 WBC 8강전을 치른다. 12일 열리는 도미니카공화국과 베네수엘라의 맞대결 승자와 만날 예정이다. 1라운드에서 맹활약한 대표팀 중심 타자 문보경(LG 트윈스)은 “미국에서 수많은 빅리거와 마주하겠지만, 그 누구보다도 정후 형과 함께 뛰는 지금이 내겐 더 의미 있다”고 신뢰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