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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연의 마음 읽기] 젖은 책을 말리다

중앙일보

2026.03.10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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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연 소설가
3월이 되자 도서관 옆 학교에 학생들이 돌아왔다. 겨울 내내 적막하던 학교에 아이들의 목소리가 피어나 담장을 넘어오니 오래 기다린 봄꽃을 보는 듯 절로 흥겨워진다. 점심시간이 되면 급식실 앞에 줄을 서서 재잘거리는데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궁금하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 밖으로 삼삼오오 몰려나오는 하굣길의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 역시 즐겁다. 녀석들의 방앗간인 편의점의 소란스러움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러니까 봄은 단연코 학교에서 먼저 시작된다. 담장 옆의 꽃나무들도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겨울잠에서 깨어나 꽃피울 채비를 하는 게 틀림없을 것이다.

개울물에 책보 빠뜨렸던 기억
쪼잔하게 주가 걱정하는 사이
전장에선 교과서가 피에 젖어

김지윤 기자
70년대 강원도 산골에서 초등학교에 입학한 나는 처음엔 누나들과 함께 책보를 메고 다녔다. 보자기에 교과서를 싸서 어깨나 허리에 둘러매고 다녔다는 얘기다. 책보는 불편했다. 뛰거나 장난질을 치다 보면 쉽게 풀어져서 책과 공책이 한꺼번에 쏟아지기 일쑤였다. 땅바닥이면 그나마 다행인데 어느 여름날 하굣길 개울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물에 빠트린 적이 있었다. 황급히 건졌지만 이미 교과서는 흠뻑 젖었고 시간이 흐르자 퉁퉁 불어났다. 무서운 선생님에게 혼날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했다.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개울 옆 땡볕이 쏟아지는 자갈밭에 국어·산수·도덕 교과서와 공책을 빨래처럼 쭉 펼쳐놓고 한 장 한 장 넘기며 말리는 수밖에. 그때 처음으로 나도 책가방을 갖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여튼 그렇게 말린 책은 다른 아이들의 책보다 덩치가 두 배는 커져 있었다. 공책의 글씨는 지워졌지만 그나마 책 속의 글자가 지워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책보를 사용하던 저학년 시절엔 새 교과서를 받으면 누나들이 반듯하게 겉장을 싸줬는데 책가방을 사용하면서부턴 내가 직접 하기로 마음먹었다. 겉장으로 가장 좋은 종이는 달력의 반들반들한 흰 뒷면이었는데 어느 집이나 늘 부족했다. 어쩔 수 없이 밀가루 포대의 황토색 속지를 쓰거나 그마저 없으면 신문지로 싸는 친구들도 더러 있었다. 교과서 겉장을 쌌는지 안 쌌는지는 선생님이 직접 검사를 했기에 형제들이 많은 친구들은 밀가루 포대를 얻으러 이웃집을 전전하기도 했다. 나 역시 누나들과 넓은 달력을 놓고 쟁탈전을 벌이느라 바빴다. 어떤 해는 등교 전 혼자 남아(누나들은 일찍 학교로 튀어버렸다) 울며 겨자 먹기로 엄마가 홍두깨로 밀가루 반죽을 밀 때 사용했던 얼룩덜룩한 달력으로 겉장을 싼 적도 있었으니….

학교를 떠난 지 오래되었고 요즘은 도서관 담장 너머로 가끔 학교 풍경을 기웃거리며 옛날 일들을 떠올리고 있는데 인터넷에 뜬 사진 한장을 발견했다. 피가 얼룩진 분홍색 책가방이었다. 뒷면 작은 주머니엔 하늘색 히잡을 두른 소녀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펼친 채 기도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토요일 아침 폭격으로 무너진 여학교에서 찾아낸 먼지투성이 책가방이었다.

가방의 주인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가방만 남아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방 안엔 무엇이 들어 있을까. 교과서와 공책, 연필이 들어 있을 것이다. 가방의 크기로 보아 초등학교 저학년이 주인일 것이다. 가방의 주인이 사는 중동의 나라는 금요일에 학교가 쉬고 토요일엔 등교하는 교육제도라고 한다. 그림 속 소녀의 동그랗게 뜬 두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소녀는 저세상에 있는 학교에 가방도 없이 등교하려면 얼마나 속이 상할까…. 며칠 뒤 굴삭기가 폭격에 사망한 여학생들과 선생님들을 묻을 묘혈을 파는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왔다. 이어 흰 수의에 쌓인 시신들의 사진이. 시신 옆 영정사진 속의 소녀들은 맑게 웃고 있었다. 살아 있는 엄마들은 그 옆에서 오열하고.

도서관 담장 너머 학교의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불이 꺼진 교실을 가끔 올려다보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전쟁은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다. 미사일과 드론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하늘을 날아간다. 기름값이 껑충 뛰었고 주식은 급락과 반등을 했다. 우리는 고작 이딴 것들을 근심하는 쪼잔한 어른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아이들만이 훌쩍거리며 피에 젖은 교과서를 말리고 있는 건 아닐까. 봄이 오려면 아직 멀고 멀었다.

김도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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