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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란의 문화노트] 천만영화 ‘왕사남’ 속 일그러진 자화상

중앙일보

2026.03.10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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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란 문화선임기자
천만영화는 당대의 현상이다. 2003년 ‘실미도’를 시작으로 관객 1000만 이상 영화가 탄생할 때마다 극적 서사와 흥행 간의 함수뿐 아니라 블록버스터 제작의 허실, 스크린 독과점의 명암, 관련 경제의 파급 효과 등이 잇단 주목거리가 됐다. 애초 기대가 크지 않았던 작품이라면 뜻밖에 감응한 관객 심리 분석도 이어진다. 사극의 경우엔 오늘날에 빗댄 설정 분석이 포인트다. ‘왕의 남자’(2005)는 2000년대 신자유주의 경쟁이 격화하는 상황에서 계급 역전 얘기가, ‘광해, 왕이 된 남자’(2012)에선 진짜보다 정치를 더 잘하는 왕의 대역에 투영된 ‘좋은 정치에 대한 갈망’이 흥행 요인으로 풀이됐다.

한국 영화 중 25번째 천만영화가 된 ‘왕과 사는 남자’. [사진 쇼박스]
1200만 관객을 향해 달려가는 ‘왕과 사는 남자’(감독 장항준)에선 일차적으로 쿠데타에 권좌를 뺏기고 17세에 생을 마감한 비운의 왕을 연민하는 심정이 부각된다. 단종(박지훈 분)의 유배지였던 영월 청령포와 장릉(단종 묘)에 관광객이 몰리고 단종 관련 도서가 불티나게 팔린다. 그러나 ‘단종 앓이’는 현상일 뿐 ‘몰입’ 지점은 다른 얘기다. 영화적 긴장은 단종 측 세력이 복위를 꾀하면서 가열되는데, 그들이 거사에 다가설수록 유배지 촌민들의 설 자리는 좁아진다. 피비린내 나는 권력 다툼에서 그들이 최대한 멀어져 있는 게 유리하단 걸 관객은 안다. 역사적 사실을 뒤집지 않는 한 패배가 예정된 길이라서다. ‘서울의 봄’에서 이태신(정우성 분) 장군 무리를 향한 안타까움처럼 말이다.

흥미롭게도 ‘왕사남’은 쿠데타 주역 수양대군을 화면에 등장시키지도 않고 단종 복위의 정당성을 전면에 내세우지도 않는다. 대부분의 관객 시선은 두메산골 촌장 엄흥도(유해진 분)를 따르게 되는데, 영화 전반부 그가 유배객을 간절히 기다리는 건 그로 인해 마을 살림이 살아나리란 기대 때문이다. 일종의 ‘유배 경제’ 속물주의, 철저한 ‘먹고사니즘’이다. 제작사 온다웍스의 임은정 대표는 이와 관련한 매체 인터뷰에서 “현대인의 부동산에 대한 갈망까지 반영해 엄흥도의 입체성을 강화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정치 격변이나 사회적 비극에도 내 주식은 어떻게 되나 경제적 저울질이 우선인 게 요즘 세태다. 그런 엄흥도가 할 수 있는 최대치는 어린 폐왕이 ‘강을 건널 수 있게’ 노끈을 잡아당기는 일이었다. 권력을 조롱하거나 풍자하면서 그 자리를 대체할 수 있는 대안 서사를 상상했던 관객들이 이젠 누구라도 위태로울 수 있는 각자도생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염치를 곱씹는 듯한 풍경이다.





강혜란([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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