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지난달 12일 중국 군인을 대상으로 CIA와 비밀 접촉을 권유하는 중국어 홍보 영상을 유튜브에 공개했다. 1분 30초 정도의 짧은 영상이지만 ‘이 길을 택하는 것이 가족과 조국을 위한 나의 싸움 방식이다’라는 자막이 눈길을 끌었다. 중국 군인이 느낄 수 있는 죄책감이나 심리적 갈등을 덜어 주려는 메시지다.
절차 중시 미국, 우방에도 냉정
산업 치중 중국, 연구 인력 눈독
우리 간첩법도 외국 확대 적용
단호한 집행 의지·역량 보여야
냉전 시기 한국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다. 국방부 차관보를 지낸 리처드 롤리스가 2023년 『Hunting Nukes(핵무기 추적)』라는 회고록을 출간했다. 1970년대 중반 CIA 서울지부 요원이었던 저자가 한국의 핵무기 개발을 저지하는 과정도 담겨 있다. 그는 핵 개발 정보를 누설한 한국 인사들을 북한의 위협을 막은 ‘애국자’로 묘사했다.
비밀 누설 한국인 칭찬한 CIA 요원 누군가에게는 배신으로 보일 수 있는 행동이 다른 관점에서는 애국으로 기록된다. 그것이 국가 간 정보전의 냉혹한 현실이다. 미국·중국·러시아 등 세계 주요 국가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보이지 않는 정보 경쟁을 끊임없이 벌여 왔다. 우방국은 있어도 우호적인 간첩법은 없다. 국회를 통과한 간첩죄 확대 형법 개정안이 지난 5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됐다. 북한 중심의 ‘적국’ 개념에 묶여 있던 간첩죄의 적용 범위가 외국으로 확대됐다. 한국도 이제 정보 경쟁의 현실을 법제도 차원에서 마주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정보전의 핵심 수단이 바로 휴민트(HUMINT·인적 정보)다. 한쪽에서는 협조자나 공작원으로 불리지만 다른 쪽에서는 간첩으로 규정될 수 있는 존재가 휴민트다. 이번 간첩법 개정 역시 외국의 휴민트 활용 현실을 법적으로 반영한 조치다. 나라마다 운용 방식은 다르지만, 오늘날 정보전의 양상은 미국과 중국 사례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미국과 중국은 정보활동의 목표부터 다르다. 미국이 국가안보와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는 데 초점을 둔다면 중국은 경제적 이익과 기술 확보를 통해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고 글로벌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비중을 둔다. 목표의 차이는 휴민트의 표적, 포섭 방식, 운용 주체, 시간 전략에서도 서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미국보다 휴민트 스펙트럼 넓은 중국 먼저 휴민트의 표적에서 차이가 드러난다. 미국이 정부 고위 관료, 군 지휘부, 핵 개발 관계자, 테러 조직원 등 국가안보 핵심에 집중한다면 중국은 그 스펙트럼이 훨씬 넓다. 첨단기술 연구자와 기업 경영진, 대학과 산업 공급망 등 경제·기술 생태계 전반이 대상이다. 여기에 학술 교류와 문화 네트워크, 해외 화교 인맥까지 더해진다.
포섭 방식에서도 차이가 나타난다. 미국 정보기관은 전통적으로 돈과 이데올로기 등을 활용해 휴민트를 포섭해 왔으며 특히 정치적 불만이나 이념적 동기가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경우가 많다. 이라크전과 아프간전 당시 쿠르드족 무장세력과 긴밀히 협력하며 작전에 필요한 정보를 확보했다. 보복 위험에 노출된 휴민트 보호를 위해 특별이민비자(SIV)와 난민 지위 제공 등을 지원하면서 정보 네트워크의 신뢰를 다진다. 반면 중국은 경제 협력, 사업 기회, 연구 교류, 투자, 네트워크 형성을 통해 장기적 관계를 구축하는 방식이 상대적으로 두드러진다.
휴민트 운용 주체 역시 다르다. 미국의 정보활동은 CIA와 같은 전문 정보기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반면 중국의 경우 국가안전부(MSS)가 중심이 되지만, 국유기업, 민간기업, 학자, 유학생, 해외 교포 등 다양하고 광범위한 네트워크가 정보활동에 활용된다.
시간 전략에서도 차이가 보인다. 미국의 휴민트가 정책 결정이나 군사 작전을 지원하기 위한 단기적·현안 중심 정보에 상대적으로 무게를 두는 데 비해 중국은 기술 축적과 산업 경쟁력 확보, 영향력 확대를 염두에 둔 장기적 정보 수집 전략을 병행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차이는 양국의 정치·전략적 인식과도 연결된다. 미국은 의회와 사법 체계의 감독 아래 법적 정당성과 절차를 중시하는 반면, 중국은 효율성을 우선한다. 전쟁의 경계를 허문다는 초한전(超限戰) 인식 아래, 기업과 학계, 해외 교포 네트워크 등 다양한 사회적 자원이 정보활동에 동원된다.
공작 거점 의심 받는 공자학당 이 같은 구조적 차이는 한국의 현실과도 맞닿아 있다. 중국은 국가정보법을 통해 개인과 기업, 단체 모두에게 국가 정보활동에 협력할 의무를 부여한다. 사회 전체가 정보기관의 잠재적 휴민트가 될 수 있는 구조다. 문제는 이런 위험이 국경 밖에서도 현실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개방적이고 교류가 활발한 한국은 중국 정보활동이 실제로 스며들 여지가 상대적으로 큰 환경에 놓여 있다.
지난해 6월 기준 국내 체류 외국인 273만 명 가운데 중국 국적자는 약 97만 명으로 가장 많다. 영향력 공작의 거점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아온 공자학당도 세계 최초로 한국에 설립됐고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국가가 한국이다. 개방성과 교류가 활발할수록 중국 정보활동이 스며들 공간도 그만큼 넓어진다는 의미다.
반대로 미국은 정보활동만큼 정보보안과 법 집행에도 엄격하다. 로버트 김 사건, 백동일 대령 사건, 수미 테리 사건에서 보듯 동맹을 위한 행위라 하더라도 국가기밀을 넘기면 끝까지 추적해 처벌한다. 정보전의 세계에서 기준은 단순하다. 우방국은 있어도 우호적인 간첩법은 없다. 이번 간첩법 개정은 한국도 냉혹한 국제 정보전 현실을 제도적으로 마주하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오래전 동남아로 출장 갔을 때의 일이다. 현지에서 영사 신분으로 활동하던 후배 A가 농담조로 “한국에서는 노바디(nobody)였지만, 여기서는 섬바디(somebody)”라고 했다. 한국에서는 존재감이 별로 없었으나 주재국에서는 제법 영향력이 있는 인사라는 의미였다. A는 자기가 마음만 먹으면 그 나라에서 못 만날 인물은 없다고도 했다.
국내 방첩 분야에 근무했던 또 다른 후배 B도 비슷한 말을 했다. 미국이나 중국 정보기관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을 때 거절하는 한국 인사는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고 했다. 미국이나 중국으로부터 인정받았다는 우쭐한 마음에 떠들고 다니는 인사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휴민트의 세계에서도 국력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 차이는 간첩법의 집행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법 조문은 같아 보일지 몰라도 그것을 얼마나 단호하게 적용할 수 있는지는 결국 국가의 의지와 역량에 달려 있다. 개정된 간첩법은 이제 곧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이 법이 실제 현실 속에서 어떻게 집행되는지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