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순 없겠지만 일론 머스크나 다리오 아모데이(앤트로픽 CEO) 같은 빅테크 창업자를 비롯해 세상 흐름을 잘 아는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지식은 AI로 대체되는 만큼 인간은 자율성과 몰입에 경쟁력의 핵심을 둬야 한다는 조언이다. 결국 흥미있는 일이 뭔지 찾아서 의지를 갖고 파고 드는 인간만 인간답게 살아남는다는 얘기일 것이다.
진작부터 이런 삶을 살아온 사람이 있다. 정부 주도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프로젝트에서 스타트업으로는 유일하게 2단계에 진출해 '국가대표 AI 스타트업' 별명을 얻은 업스테이지 창업 멤버이자 교육 총괄 손해인(34) 부사장 얘기다. '울산의 대치동'이라는 옥동 키즈로 나고 자라 여느 한국 학생처럼 시험에 목 매던 범생이였지만,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집요하게 찾기 시작하면서 AI 세상이 오기 전 이미 새 시대에 걸맞는 준비를 했다. 코드 한 줄 못 짜는 문과 출신이 엔비디아를 거쳐 AI 스타트업 임원이 된 배경이다. 지난 5일 업스테이지 공유 오피스가 있는 서울 강남역에서 만나 그의 독특한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안혜리 논설위원
남들 좇아 대기업 가는 대신
스스로에게 '나'를 찾을 시간 줘
최저시급 받고 대표처럼 일했더니
AI 시대 인간 고유 경쟁력 됐다
최저시급 인턴의 야망
그 시절 최저시급(5580원, 월 100만원 수준)보다 한참 적은 월 70만 원짜리 신생 비영리재단(한국화가협동조합) 인턴이 2015년 대학 졸업 후 내 인생 첫 커리어였다. 온갖 잡무를 하다 홈페이지 만드는 일까지 맡았다. 지금처럼 AI가 있던 시절도 아니고, 문과생에겐 벅찬 일이었다. 다행히 이 재단 만든 대학 은사님이 본인 지인인 이용덕 엔비디아 지사장더러 "도와주라"고 부탁하셨고, 난 그분 도움받아가며 밤낮없이 주말까지 반납한 채 정말 열심히 일했다. 어느 날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 "엔비디아 코리아 인턴 해보겠나?" "
때는 2015년 말. IT 세상 밖에선 엔비디아 이름조차 생소하던 시절이다. 네이버 검색부터 했다. 여전히 뭐 하는 곳인지 모호했지만 대충 컴퓨터게임 관련 회사라는 건 알았다. 주변에 IT 쪽 사람이 전무한 데다 난 모바일 게임도 안 하는 사람이라 거절했다. 그림 그리기 좋아하는 경영학과 출신이라며 막연히 예술경영 분야에서 승부 보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그런 계획과 결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인턴 시작하면서 매일 그 날 뭐가 재밌었고, 의미 있었는지 정리하는 출근일기를 썼는데, 그날 벌어진 일을 써내려가다 보니 안정적인 취직을 미루면서까지 '나'를 찾겠다고 스스로에게 3년의 방황할 시간을 줘놓고선,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분야라는 이유만으로 안 간다는 건 원래 목표와 굉장히 어긋나는 결정이라는 걸 말이다.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부탁해 인턴 채용 과정을 밟았다.
사실 특별한 채용 과정이랄 게 없었다. 그 시절 엔비디아 코리아는 개발자든 영업이든 경력직만 가득한 직원 80여 명의 군살 없는 조직이었다. 비서 말고는 인턴은커녕 신입도 안 뽑았다. 조건은 딱 최저시급인 월급 115만원에 1년짜리 마케팅 담당이었다. 희망고문일지라도 많이들 내거는 조건부 정규직 전환 약속조차 없었다. 회사와 무관하게 목표를 세웠다. 1년 뒤 정규직 되기? 아니다. 인턴 끝나는 날 나랑 같이 일한 사람들이 계속 나랑 같이 일하고 싶다고 만들기였다.
계약직 전환이 감사한 이유
엔비디아에서 폼 나는 '마케팅 담당' 간판을 달았지만 실제 한 일은 당시 선풍적이던 PC방 게임 '오버워치' 게임 커뮤니티에 엔비디아 게임 커뮤니티인 '엔비디아 프렌즈' 자격으로 댓글 달기였다. 엔비디아 브랜드를 알리려는 장기 전략 차원에서 지사장이 캠퍼스 투어와 커리어 토크 할 때 쓸 자료 만들기도 내 몫이었다.
누군가는 잡일이나 불필요하다 치부할 일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뚜렷한 목표가 있던 난 달랐다. 마침 엔비디아는 정규직이든 아니든, 경험이 있든 없든 필요한 일을 기획하면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분위기였다. 아무도 안 시키는데 오너십 갖고 온갖 일을 벌였다.
가령 댓글. 어떻게 하면 더 잘할까 고민하다 당시 유행하던 커뮤니티 밋업(meet-up·번개 모임) 찾아다니며 게임판 사람들과 친해졌다. 댓글 달 때 잘 모르는 내용이 나와 어려워하면 다들 대댓글로 도와줬다.
돌이켜보면 타이밍이 참 좋았다. '오버워치'가 워낙 흥해 엔비디아의 지포스 GPU 업그레이드 수요가 급증한 건 말할 것도 없다. 입사 불과 몇 달 뒤인 2016년 3월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 대결로 세간의 AI 관심이 폭발한 덕분에 딥러닝이나 GPU 같은 테크 용어, 그리고 엔비디아가 어떤 회사인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넘쳤다. 세상을 바꾼다고 느꼈던 이 회사에서 살아남으려면, 특히 기술 기반 없는 나로선 이런 용어 이해는 기본이었다. 급한 마음에 『파이선 첫걸음』이런 류 책을 샀다. 어려운 걸 떠나 너무 재미없었다.
공부할 수밖에 없는 흥미로운 환경을 만들어야 했다. 공부를 일이자 놀 거리로 만드는 마법을 부려야 했다. 그게 페이스북 커뮤니티였다. 'Ctrl Alt Del밖에 모르는 문과생이 전하는 기술 이야기'라는 셀프 프로젝트를 만들어 페북에 테크 관련 내용을 포스팅했고, 단숨에 업계 주목을 받았다. 포장만 그럴듯한 게 아니라 실제 초등생도 이해할만한 눈높이의 풍성한 자료를 끊임없이 올렸기에 가능했다.
순식간에 1년이 지났다. 한국 지사는 내 일의 가치를 인정했지만 본사는 정원을 안 늘려줬다. 새 제안이 왔다.
" "계약직으로라도 해보겠나?" "
당연히 "예스"였다. 고용 형태나 찔끔 월급 인상은 중요하지 않았다. 팀원들이 기꺼이 나랑 같이 일하고 싶다는 게 감사했다.
1150만원 받는 것처럼 일하기
경영학과(아주대) 입학과 동시에 빡세기로 유명한 마케팅 소학회(RPM) 들어가 4학년 1학기까지 쉬지 않고 프로젝트를 했다. 이제 남들처럼 대기업·은행 입사하려면 취업 준비에 전력을 쏟아야할 시간이 왔다. 그런데 문득 "날 뽑을 이유가 있나" 싶었다. 내가 뭘 좋아하고 잘하는지, 다시 말해 나는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게 우선이었고, 그걸 찾겠다고 무작정 프랑스 배낭여행을 떠났다. 답은 못 찾았지만 귀국 비행기에서 결심했다. "살러 다시 와야겠다. " 이에젱(IÉSEG) 비즈니스 스쿨에서 1학기짜리 교환학생을 마치고도 프랑스가 너무 좋아 1년을 더 눌러앉았다.
여전히 답은 못 찾은 채 돌아와, 남들처럼 포털 '독취사(독하게 취업하는 사람들)' 카페 들어가 자소서 쓰고 인터뷰 준비했다. 나도 독한 사람이었는지 20~30 군데 떨어진 후에 대기업 한 곳, 시중은행 한 곳에 합격했다. 독취사가 알려준 그 회사 인재상을 반영한 모범답안을 달달 외운 덕분이었다. 문제는 자소서·인터뷰 어디에도 진짜 내가 없었다는 점이다. 서른 즈음 후회할지 모르는 리스크를 안는 대신 다른 선택을 했다.
" "나에게 3년의 시간을 주자. " "
그렇게 취업을 포기하고, 3년을 스스로에게 주면서 약속했다. '어떤 선택이든 돈을 1순위로 놓지 않겠다'는 거였다. 학교 지원금 명목으로 받은 최저시급보다 적은 70만원 인턴 월급, 115만원 최저시급 인턴, 그리고 여전히 미래 보장 없는 계약직 사원…. 보잘것없는 고용형태만큼 하찮은 월급명세서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가 뭘 할 때 행복한지 찾는데 온 에너지를 써야 했으니까.
그래도 눈물 쏟을 일은 있었다. 당시 엔비디아 사무실이 물가 비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 있었는데, 115만원으로는 빠듯했다. 친구라도 만나려면 점심을 걸러야 했다. 대기업 다니는 친구가 "한 달에 고작 100만원밖에 적금 못 넣었다"고 푸념하면 "왜 나만 이런 어려운 길을 가는가" 싶어 위축됐다.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 "내가 비록 115만원을 받지만 1150만원 받는 사람처럼 일하겠다. 115만원만큼만 일하면 난 3년 뒤에도 그 정도에 머물러 있겠지만 1150만원 받는 사람처럼 일하면 그 돈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돼 있을 거다. " "
엔지니어팀·영업팀 가리지 않고 모든 회식, 모든 워크숍에 다 따라다녔다. 유일한 비정규직인 동시에, 팀 간 왕래가 잦지 않은 이 조직에서 전 직원을 다 아는 유일한 직원일 수 있었던 이유다. 안 불러도 재밌어서 무작정 갔다. 모두 머리에 일 생각만 가득해서 회식 때도 기술 얘기뿐이었다. 한때 한국 자주 오던 창업자 젠슨 황 얘기도 흥미로웠다. 놀면서 자연스럽게 공부한 셈이다.
2년이 또 훌쩍 흘러, 정규직 전환 또는 퇴사의 갈림길에 섰다. 본사에선 이번에도 정원을 더 주지 않았는데 내부 업무 조정 등 모두 힘 써준 덕분에 정규직이 됐다. 드디어 정규직이 됐다는 기쁨보다 열심히 일한 걸 회사와 동료가 알아봐 줬다는 경험이 더 컸다.
스스로에게 준 3년의 방황은 이렇게 가치 있는 결말로 이어졌다. 그때 결심했다. 방황을 3년으로 끝내지 않고 평생 이어 가겠다고. 5년의 엔비디아 생활을 접고 2020년 업스테이지 창업멤버로 합류한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 이 방황은 또 어떻게 이어질까.